활동가 인터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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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

30여년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여전히 투쟁의 현장에 서면 힘이 솟는다는 수상한 그녀, 김정임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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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터뷰 계획을 잡을 때 나는 제주 여성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때 떠오른 사람이 두 활동가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김정임 '송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표이다. 어느새 흰머리가 여기저기서 비어져 나오고 얼굴에는 세월의 깊은 주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그녀지만 그녀를 만날 때마다 송악산을 반드시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기를 느낀다. 그녀의 결기는 연대를 이끌어내고 머뭇대던 이들을 투쟁의 현장으로 불러 모은다.

** 김정임의 딸기 하우스. 송악산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이미 수확을 끝냈지만 정리하지 못한 딸기모와 그 사이 사이로 일부가 이미 장마비에 젖어버린 노지 양파들이 보인다.


아름다운 풍광 곳곳에 피눈물이 서려있는 제주도이지만 그 중 송악산은 제주의 아픔이 상징적으로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우선 송악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픈 송악산의 기구한 역사는 2020년 6월 22일 진행된 ‘송악산,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토론회 중 조성윤 특별연구원(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의 발제문을 참조하여 정리해 보았다.


1930년대 일본군이 송악산 아래 벌판인 알뜨르 일대를 비행장으로 만들었고, 송악산 곳곳에 굴을 뚫었다. 지금도 송악산 곳곳에는 진지동굴들이 남아있다. 해방 후 비행장 터는 한국 군대가 차지하였는데 국방부는 강정 해군기지 건설 당시 제주도에 알뜨르 소유권을 넘기겠다며 협상카드로 이용했다. 하지만 강정 해군 기지 건설 후에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그 땅을 쥐고 있는 국방부는 제2공항이 건설되어서 공군기지로 사용하게 되면 제주도에 넘기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번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두번째는 지켜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공군 레이더 기지가 있는 모슬포 지역은 여전히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있는데 일제시대 일본군에게 토지를 강제수용당했던 주민들은 지금 국방부에게서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도는 1985년에 송악산 일대를 관광지구로 지정하였고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도 군사시설 보호구역 내 토지 중 주민들이 임대하고 있는 토지를 돌려주겠다는 공약을 발표했기에 주민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88년, 정부가 송악산 일대의 관광 개발 계획을 취소하고 오히려 기존 국공유지 70만평에 주변 토지를 더 포함시켜 197만평 규모의 군사기지와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이 알려졌다. 지역주민들과 지역 사회, 재경 제주도민들이 똘똘 뭉쳐 군사기지 설치 반대 운동을 진행했고 결국 정부는 1990년 3월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군사기지계획이 백지화되면서 주민들은 개발의 꿈에 부풀었고 우여곡절 끝에 1999년 4월, 프랑스, 이탈리아 등 해외 투자자를 끌어들여 투자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계획은 환경 파괴 문제,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송악산 보존 문제, 송악산 일대의 일제 역사적 잔재 및 4.3유적의 보존적 가치 등을 주장하는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개발을 찬성하는 대정읍 기관단체장과 제주도 지방정부, 지역 유지들과 그에 맞서 개발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시민들, 전문가들이 대립했고 그 갈등은 극한으로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사업능력이 없는 사업자가 사업 착공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제주도는 2003년 송악산 관광지구 지정을 해제하였다.

제주도가 2010년부터 부동산투자이민제를 도입하면서 중국자본인 신해원유한회사는 유원지로 지정된 송악산 일대 40만 평방미터의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땅에 대규모 호텔과 관광시설을 건설하겠다는 뉴오션타운 조성사업이 계획되었다. 부동산투자이민제 도입과 더불어 2015년 제2공항 예정부지가 발표되면서 제주도의 부동산 가격은 급등하였고 이주열풍과 중국 관광객 급증으로 쓰레기, 해양오염, 처리되지 않은 오폐수, 중산간 난개발 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도민들 사이에서도 점차 개발에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송악산뉴오션타운 개발계획은 2019년 1월 조건부로 환경영향평가 심의를 통과했지만 결국 2020년 1월 도의회가 부동의 처리하면서 새로운 변곡점을 맞고 있다.


송악산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풍경, 범섬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탐욕스럽게 이용하려는 이들과 그곳을 군사적 요충지로서 미리 점찍어놓은 권력자들은 송악산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들과 맞서 김정임은 밤잠을 쪼개가며 싸우고 있다.

** '송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송악산 답사 후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 앞에서  "송악산 난개발에 반대합니다" 


Q. 세 번의 큰 어려움이 송악산에 있었다. 이번 세 번째 싸움에 맞서는 ‘송악산 개발반대 지역대책위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2019년 1월에 뉴오션타운개발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가 조건부 통과되었다. 마을의 개발위원들이 심의하는 자리에 가서 우격다짐으로 통과를 끌어냈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그 때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전전긍긍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모습을 본 아이가 “엄마, 그렇게 아파하는 것보다 싸우는 게 낫겠다”라고 말을 하더라. 그리고 정말 뭐라도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송악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다’ 굳게 다짐했다.

송악산 싸움이 벌써 몇 번째가 되다보니 앞서의 싸움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제안했고 처음에 셋이서 ‘송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속해있는 대정여성농민회, 대정농민회를 찾아가서 연대를 요청했다. 이후 대정여성농민회의 조직적 연대는 송악산 싸움을 지속화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대정여성농민회의 합류 이후 서명 작업을 진행했다. 상모1리에서만 1100여명의 서명을 받아서 제주도의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문제,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라고 보았기에 운영위원들 동의하에 제주 지역 전체에서 서명 작업을 받기 시작했고 12,000여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Q. 지금 지역 분위기는 어떤가?

지난 번 도의회가 송악산 뉴오션타운 개발사업 환경영향평가를 부동의 시킨 후 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 마음의 기세가 다소 꺾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내용을 잘 모른다. 시내 중심부가 아닌 이 지역에서 토론회를 여는 이유도 송악산이 역사적으로, 지질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이다.


Q. 고향이 대정인가? 송악산에 대한 추억도 이야기해 달라.

대정에서 나고 자랐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부하러 잠시 1980년에 고향을 떠났다. 학업과 직장생활 등을 하다 5년 정도 지나서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학창시절 소풍은 늘 송악산이나 산방산으로 갔다. 송악산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박수기정의 풍경이 너무 멋졌다. 송악산에 갈 때마다 '세계 어느 나라 아름다운 풍경이 부럽지 않다, 정말 좋구나' 느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매일 아침에 5시에 일어나게 해서 송악산과 산방산을 번갈아 데리고 다녔다. 분화구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아침밥을 먹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김정임은 대정에 돌아와서 1988년 송악산 공군기지 반대투쟁에 앞장 섰고 여성 농민운동을 했다. 2012~2016년에는 제주여성농민회 회장을 맡아 FTA싸움의 선두에 있었으며 제주지역의 박근혜 탄핵 촛불을 시작했다. 지금도 대정에서 하우스와 밭을 포함해서 2300평 정도의 농사를 짓고 있다. 김정임과의 인터뷰는 어렵게 잡혔다. 여느 해보다 일찍 찾아온 장마로 노지 수확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고 예보된 날 인터뷰를 약속했는데 그 날 해가 반짝이는 바람에 농사일이 바쁜 김정임을 잡을 수 없어 결국 인터뷰를 연기했다. 다시 약속을 잡은 날, 김정임은 아침 새벽부터 일을 하다 나와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농부의 천금 같은 시간을 빼앗고 있음을 실감했고 미안했다.


Q. 어떻게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대정에 돌아오자 마자 농사를 짓고 농민운동을 시작했나?

이야기를 풀자면 조금 복잡하다. 대학 때 기독교농민 100년사를 읽었다. 그리고 내가 카톨릭 신자인데 카톨릭 농민회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많이 했다. 당시에는 카톨릭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심각하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수도원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농촌에 가서 농촌 운동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절친했던 친구에게 ‘내가 대정에서 뿌리내리고 농사 지으면서 살 생각이다. 주변에 농사짓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 했더니 친구가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남편은 나보다 6살 위였는데 지역에서 천주교 청년회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고 무엇보다 청년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마땅한 수입이 없었기에 엄청나게 반대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장녀인데다 나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었다.

그 때 남편은 가게라도 운영하면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기술을 배워가면서 유리가게를 시작했다. 다행히 집에서도 결혼을 승낙했고 바로 그만두려 했던 유리 가게는 가게를 차리면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더 운영해야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거의 10년 가까이 운영했다.

농사를 조금씩 짓기는 했지만 전업농은 아니었고 유리 가게를 하면서 대정농민회 활동을 남편과 같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회비를 납부하러 갔더니 우리 이름이 명부에서 지워져 있었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이들 중심으로 농민회를 바꾸려 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명부에서 제외한 것이 다소 섭섭했다. 왜 그 때 그랬는지 듣고 싶었지만 그 때 농민회에서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나는 몇 년 후에 여성농민운동을 시작했지만 남편은 그 때 얻은 섭섭함과 상처 때문인지 다시는 농민운동하지 않겠다 말했고 결국 지금까지 안하고 있다. 어찌보면 남편의 운명이 바뀐 사건이다. 좋은 운동가로서 지역 사회에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지금도 여전히 아쉽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게 된 것은 유리가게를 그만 둔 30대 중반 부터이다. 처음 시작할 때 1650평 밭에서 무와 감자 등으로 시작했는데 갈아엎는 게 일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하우스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빚은 더 늘었다.

** 2015년 11월 농민대회, 밥상용 쌀 수입반대 집회


Q. 잠깐 한겨레신문 지국을 운영했다고 들었다.

결혼 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민주화투쟁 이후 나는 진보 언론의 탄생을 환영했고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던 20만원을 털어서 아이 이름으로 한겨레신문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지역에서 한겨레신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읽게 해서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알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게 중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리가게를 운영하면서 한겨레신문 지국을 만들었다.

당시 우리가 맡은 구역은 창천에서 신도3리 까지였다. 0부에서 시작해야 했고 한 부도 공짜가 없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한겨레신문 구독을 권유했다. 그래서 많을 때는 1500부까지 나갔는데 전국에서 인구 대비 제일 많이 나간 지국이었다. 새벽 2시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오토바이 타고 4시에 출발해서 배달했다. 집집마다 다니다 보면 6시 이전에 배달이 끝난다. 힘들었지만 아침마다 신문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을 느꼈고 그러한 마음들이 힘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만삭이 되면서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지국을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우리가 지국 운영을 그만 두면서 지역에서는 한겨례신문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사라졌다. 지금도 우편으로만 받아볼 수 있다.


Q. 대정에 돌아오고 나서 몇 년 후 송악산 군사기지 반대 싸움이 대대적으로 있었다. 그 때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

한겨레신문지국을 운영하고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는 전국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한겨레신문의 작은 박스기사였는데 송악산 공군기지 계획과 관련된 기사였다. 당시 남편 친구였던 양영운(전 송악산공군기지결사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씨가 집에 왔을 때 그 소식을 알렸고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 같이 고민하고 대책을 세웠다. 

그 당시 지역에서 우리가 유리가게를 하고 있어서 유일하게 트럭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녁 8시만 되면 어김없이 트럭에 마이크를 싣고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송악산 공군기지의 부당함에 대해 알렸다. 두살이었던 큰 딸이 같이 다녔고 내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다행히 그 때에는 지역 전체가 공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분위기여서 응원과 지지를 크게 받았고 음료수도 많이 얻어먹었다. 

당시에 두살이던 딸은 한달 전 서울에서 출산을 했는데 너무 바빠서 아직도 가보지 못하고 있다. 뱃속에 있던 둘째는 작년에 결혼을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송악산이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 아프기만 하다.  


Q. 네 아이 육아와 농민 운동, 농사를 같이 하기가 너무 어려웠을 것 같다. 육아를 하면서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인가?

아이들 분유살 돈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적이 있다. 그 때가 힘들었다. 자녀들을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키우려 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시어머니가 육아에 도움을 많이 주셨다. 시어머니의 남동생이 4.3 당시 대정중학교 간부여서 토벌대들이 어머니를 끌고 가서 남동생의 행방을 대라고 전기고문을 많이 했다. 그 후유증으로 시어머니는 신체적인 활동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 늘 계셨고 육아에 다소 도움을 주셨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많았고 모든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는 여자도 활동해야 한다며 나를 응원해 주었고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Q. 가정 내에서 힘들었던 부분은?

가사일 분담 등 성평등한 가정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어려운 부분이었다. 가정 안에서 대화로 풀어내고 역할을 차근 차근 분담하면서 느긋하게 가져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활동량이 너무 많아서 시간에 쫓겼다. 대화를 통해 성평등한 가정을 만들어가지 못했고 그래서 부딪혔다. 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남편이 뭐라 그러든 우선 박차고 나왔다. 일이 너무 바빴다. 지금 생각하면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설득하는 작업을 못했던 것이 아쉽다.

딸이 결혼식 때 성평등한 부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사위는 노동운동가인데 성평등한 부부가 되겠다고 약속해서 흔쾌히 결혼을 허락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아빠에게도 그런 부분을 말하고 있다.


Q.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쉬웠던 것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같이 대화를 나눌 시간적 여유를 내지 못했던 것.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내 활동량이 아주 많아졌고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고 아이들이 컸으니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겠지 믿었다. 아이들도 자기 앞가림을 워낙 잘했다. 나중에 아이들 말을 들어보니 바빴던 엄마에 대해 서운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활동을 많이 지지해 준다.


Q. 예전부터 제주는 여성의 생활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왔고 다른 지역에 비해 여성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편임에도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더 가부장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 가부장적인 문화가 계속 유지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제주여성들이 세다고 하지만 대놓고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스스로가 성평등에 대한 관점을 잘 다져야 한다. 여성농민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성평등 농촌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 스스로 성인지적 관점, 성평등한 사회에 대한 관점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은 제주 지역에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올해도 여성농민회에서 성평등강사를 모집하고 있다. 나도 너무 하고 싶은데 우선 지역에서 송악산 싸움에 매진해야 하기에 못하고 있다.


Q. 아무래도 제주지역 사회가 좁은 공동체이다 보니 서로 얼굴 붉히고 까칠하게 말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그러다보니 여전히 관계 안에서 가부장적인 요소들이 잔존하는 것 같다. 농민으로서, 농민운동 당사자로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인가? 보람 있었던 것도 같이 이야기해달라.

내가 제주여성농민회 회장할 때 한중 FTA가 체결됐다. 경주협상단으로 가면서 싸웠고 탑동에서 농업인단체협의회 5000명이 참여하는 싸움을 이끌면서 죽도록 싸웠다. 하지만 한중 FTA는 체결되었다. 그 때 박탈감과 상실감이 있었다.

그리고 부회장을 할 때부터 강정해군기지 싸움에 뛰어들었다. 송악산 공군기지가 무산되고 정부는 화순에 해군기지 건설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강정 일부 주민들을 회유하는 비겁한 방식을 통해 강정에 해군 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강정해군기지는 치열한 저지 싸움을 벌였음에도 결국 건설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성산 공군기지 시도를 통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주 군사기지화 시도는 정말 집요하다. 제주의 운동진영은 강정 해군기지 건설로 상처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였다.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힘들었다.

** 백남기 농민의 추모식에서


Q.  치열하게 여성농민운동을 했고 지금은 고향의 송악산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삶을 바칠 만큼 송악산이 중요한가?

농민운동에 매진하다보니 지역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남은 삶은 송악산을 지키고 송악산을 단초로 제주를 제대로 된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데 쓰려 한다. 

송악산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지난 4월 도의회 주관으로 진행된 토론회를 통해서 송악산이 세계적으로 희귀성이 있고 지질학적으로도 화산교과서라 불릴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확증할 수 있었고 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송악산이 세계적으로 지켜야하는 곳임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송악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이 일단락되면 국방부가 소유하고 있는 알뜨르 비행장 터 70만평의 땅을 지역으로 환원하고 산 역사의 현장으로 만드는 운동까지 가려고 한다. 긴 운동일 수밖에 없고 쉽지 않은 싸움이다.

나의 세대에 안 될 수도 있지만 씨앗을 뿌려야 이후에라도 가능하다. 열매가 맺고 안 맺고는 역사에 맡긴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지역 어르신들 마음 속에는 군사시설을 위한 강제 수용과 강제 노동 등 역사의 수난을 겪으면서 치유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다. 송악산 일대를 산 역사의 현장으로 만드는 움직임을 통해서 지역주민들이 아픔을 극복했으면 한다. 평화의 시작은 제주도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하겠다는 단단한 마음을 비치니까 주변에서도 같이 하겠다고 한다.

** 드론으로 찍은 송악산 사진(강정효 SNS에서 퍼옴)


인터뷰하는 동안 김정임의 휴대폰은 불이 났다. 토론회 관련 전화, 가족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내가 확인할 수 없는 갖가지 전화들. 그리고 카페에 앉아 인터뷰하는 동안 카페로 들어오는 지역주민들이 있었고 그 때마다 김정임은 일어나서 깍듯이 인사를 드리고 송악산 토론회에 대해 알린다. 꼭 오시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김정임보다 훨씬 나이가 위로 보이는 남자 분이 묻는다.

“송악산을 개발하자는 거냐? 하지말자는 거나?”

“반대만 하지 말고 우리 지역에 가져올 것은 가져오면서 해야 한다”

김정임은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는 운동보다 지역주민, 전문가들과 토론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그 대안을 가지고 다시 지역주민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래서 본인도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인터뷰를 진행하다 동네 어르신들이 들어오자 냉큼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고 송악산 토론회에 대한 이야기를 지역 주민들과 나눈다.


Q. 제주의 정치를 살펴보면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정치 대표성은 너무 미미하다. 여성 농민운동가들을 정치인으로 만들려는 작업이 왜 이뤄지지 않고 있나?

현애자 전국회의원 이후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제주는 농촌의 성평등이 이뤄지지 않았다. 집안을 설득해야하고 경제적 뒷받침을 같이 고민해야 하는데 적극적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생존권 싸움 중심으로 해왔고 여성농민의 정치세력화까지 고민하고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었다. 이제는 그 생각까지 나아가고 있다.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 정치로 가는 것은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이 되고 그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은 누구나 정치에 진출해야 한다.


Q. 운동을 하면서 마음에 드는 후배 동료가 있었나?

최근에 옆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후배 중 하나가 굉장히 판단이 빠르면서 올바른 관점을 갖추고 있다. 나 정도 나이가 되면 살아오면서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 많고 그것을 고치기는 정말 힘들다. 이런 것들을 지적해주면 나는 좋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쁜 기회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앞에서 정확히 짚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뒤에서 하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Q. 지적을 당하면 자존심 상하지 않나? 지역사회 안에서 운동도 오래했고 관록이 있는데.

그런 것은 자존심 상하지 않는다. 언제나 나는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고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당신의 방식은 헌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같은 에너지로 활동을 하는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면서 건강이 염려된다.

목표를 정하면 주변을 돌아보기보다 앞으로 나가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래서 서운함도 잘 안탄다. 그리고 다행히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체력을 물려받았다.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또 다른 나의 비결은 투쟁 현장이다. 조금 지쳐도 투쟁하러 다녀오면 다시 힘이 생긴다. 좀 힘들다 생각되면 투쟁하러 가야한다. 그래도 요즘 며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띵하다. 주변에서 건강 챙기라고 걱정을 많이 한다.


Q. 본인이 서운함을 안타면 주변 사람들이 가진 서운함에도 무감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그걸 깨닫고 있다. 내가 앞으로 막 나가다 보면 주위 분들이 나에게 서운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여성농민회 회장할 때도 내가 ‘하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고 있기도 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때 '내가 그랬나' 한번 생각해 본다. 이번 송악산 관련 회의할 때도 누가 나에게 ‘그냥 관철시키는 경향이 있군요’ 하더라. 

잘 몰랐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로 인해 사람들이 힘들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Q. 하지만 그것이 힘일 수 있다. 대신 옆에서 그런 것을 보완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의 표명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고 같이 열심히 싸우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리더는 항상 꿋꿋하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Q. 죽을 때까지 투쟁할거냐? 말년을 평화롭게 보낼 계획은 없나?

나는 투쟁의 현장에서 죽고 싶다. 송악산을 지켜낼 때까지 내 한 몸 불사를 각오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지역에서 승리의 경험을 자꾸 만들어가야 이후 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


Q. 남편은 뭐라고 하는가?

몸 챙겨가면서 하라고 걱정한다. 남편은 이제 둘이 편하게 놀러도 다니고 싶어 하지만 나는 아직도 투쟁해야 할 현장이 있다. 그리고 남편에게 가능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독려한다. 서로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편이다.


Q. 제주도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가?

말로 지속가능한 제주를 떠드는데 정말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제주를 만들어야 한다. 최근 영어교육도시 2단계 개발사업이 곶자왈에 추진된다는 뉴스를 듣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처음 영어교육도시가 제주의 서쪽 허파인 화순 곶자왈을 밀어가면서 건설될 때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에는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이 많아 반대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고 결국 영어교육도시가 세워졌다. 그런데 남아있는 곶자왈에 다시 2단계 사업을 진행한다니 제주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말이다.

자연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인간은 기나긴 역사에서 점 하나도 찍을 수 없는 존재이다. 제주도는 더 이상 망가져서는 안 된다. 훼손된 곳도 복구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위인전을 즐겨 읽었고 부모님에게 늘 위인전을 사달라고 졸랐던 김정임은 義(의)를 중시하는 성향을 타고난 듯하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깃발을 세우고 돌진하는 장수가 연상된다. 현재는 소통 중심의 리더십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각자 성향에 맞는 리더십이 있고 싸움의 시국에서 빛을 발하는 리더의 상이 있을 뿐이다. 김정임이 보여주는 결기는 송악산을 지키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조금 더 충분한 숙면을 취하면서 몸을 돌보았으면 좋겠다. 제주 투쟁의 현장에서 김정임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 제주에서 진행된 박근혜 탄핵촛불 집회에서




활동가이야기주간2020 프로젝트의 '활동가인터뷰 공모 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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