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인터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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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향해 가는 희망 자전거, 두바퀴랑위드 안경남

박형관
조회수 309

“순수하시다~”

안경남 사무국장님 처음 뵜었던 2019년 9월의 어느날 첫 인상이 “어~! 대단하시다.” 로 바뀌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흔히들 ‘볼매’라 부르는 사람 중 한분이신 듯 하다. 근 4개월 가까이 매일 보다가 최근 들어 자주 못 뵙게 되었어도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는 참 이상한 매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 때마침 활동가 인터뷰를 하라니 핑계삼아 대표님과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고 만났다.

(광주사회적기업성장지원센터에서 만난 안경남 대표)


현재의 나? 과거의 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과거의 나를 만나는 느낌

학창시절의 저는 유난히 내성적이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던 꿈 많은 소녀였답니다. 현실에서의 삶과 소설 속 세상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 단순히 읽기로만 끝났던 독서의 영향으로 현실과 이상의 갭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염세적이랄까? 아무튼 생각이 많은, 일명 쓰잘데기 없는 헛생각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권합니다. 독서한번 여행한번 토론한번 책에서 느끼고 현실에서 경험하고 토론으로 남의 생각과 내 생각을 정리하는 슬기로운 독서생활!  한참 사춘기시절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에 취직이 잘된다는 여상에 진학했지만 헛생각 많은 저는 정확한 숫자 개념이 없어 입학한지 한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두면서 가난한, 더 이상 사장님이 아닌 부모님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지요. 참 손 많이 가고 키우기 어려운 자식이었던 거 같아요. 그 후로도 반복되는 여러 성장통을 겪었지만, 이제는 그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그래도, 우리 잘 크지 않았냐!’라고 말하고 있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답니다.

결혼하고 나서 잠깐 전라남도 장흥에 살았어요. 둘째를 임신하면서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문화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동화구연’은 저의 생활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애들 키우면서 읽고, 놀고, 아주 좋은 놀이였고 즐거움이었어요. 삼형제 모두 유치원에 가고, 본격적으로 강의활동을 할 수 있었던 저의 사회생활에 마중물이었지요. 강의활동과 청소년 비전 형성 코칭을 하면서 왕성한 30대를 보내고 훅 들어오듯이 불혹의 나이 40대를 맞았지요. 세월이 그렇게 오더라고요.


자전거 학교 강사가 필요해

지금은 ‘00 지역아동센터’ 서00센터장의 얘기에 자전거도 탈줄 모르면서 덜컥 자전거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아마, 청소년들의 꿈에 자기 삶을 투자한 센터장님의 성향이 저랑 비슷해서 무조건 신뢰 했던 것 같아요. “자전거도 못 타면서 어떻게 강사를 해” 지금 생각해보면 개그지요.
서00 센터장과의 인연은 지금도 청소년들과 함께 ‘꿈’이라는 길을 만들어 가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전거를 처음 접하게 되었던 저는 유난히 운동 신경도 없고 비 활동성이라 그 후로 자전거 타기까지 애 좀 먹었습니다. 자전거 못 탄다고 힘들어하는 초보님들 걱정말고 저에게 오세요. 제가 그 속 잘 알아요.(웃음) 벌써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릴 만큼 세월이 흘렀네요.


돌고 돌아 자전거를 통해 세상을 보기

고등학교 1학년 때 화순역에서 송정리까지 당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하고 겪었던 ‘5.18’의 기억이 있어요. 1980년 5월 어느 날 큰집이 있는 순천으로 할머니 심부름을 갔는데 5월 20일 순천역에서 첫 기차표를 끊는데 화순까지 밖에 안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순가면 송정리 가는 방법이 있겠지? 생각하고 저는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고, 저를 배웅해준 사촌오빠가 집에 도착하니 ‘광주에 난리가 났으니 잠잠해질 때 까지 애를 광주 집에 보내지 말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데요. ‘작은아부지 경남이 첫차타고 광주 갔어요.’

화순역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두 줄로 맞춰 걷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화순 주남마을쯤 인거 같아요. 흑백영화에서나 봄직한 (트럭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광경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제 옆에서 걷던 아저씨가 "집이 어디냐?
순천은 왜 갔냐"는 등 그냥 그런 것들을 물으셨어요. 아마 겁먹은 저를 안심 시키려고 그러셨던 거 같아요. 광주에 들어서니 어어?? 뭔 일이여?? 싶더라고요. 양동 천변 군데군데 엄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목욕다라 만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주먹밥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트럭들...

개미굴 같은 골목길을 어떻게 걷는지도 모른 채 혼동에 혼란스러운 그때 그날, 갑자기 대열이 흩어지면서 저랑 나란히 걷던 아저씨가 제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어요. ‘총소리가 났으니, 너희는 이런 거 보면 안 된다. 이 길로 쭉 가면 송정리가 나오니 절대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지금의 양동 지하철역 앞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첫새벽에 기차를 타고 해가 너울질 때 송정리 집에 도착했어요.

대문 앞에서 초췌해진 할머니가 저를 보시더니 미동도 없이 저를 안고 우셨어요.
‘살아 와 줘서 고맙다’
아마, 그 후로 며칠은 다리 아프다고  화장실도 안가고 엄살을 피웠을 거예요. ㅎㅎ


지금은 생사안부가 궁금한 아저씨, 늦은 인사를 드립니다. 그때 아저씨 옆을 걷던 여학생이 아줌마가 되어 ‘광주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돌아오는 시간들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제가 이일을 지속, 앞으로도 계속 하는 건 희망의 손, 생명의 손이 되고 싶어서요. 518 그날, 제 손을 잡아 주던 그 어른의 ‘손’처럼.


네가 하는 일이 사회에 보탬이 되고 너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라.

살아보니 그런 일은 없더라고요. 그러다 만났지요. 자전거를. 부잡스러운 삼형제를 키우면서도 늘 뭔가를 했던 거 같아요. 독서지도, 유아교육, 방통통신 멀티미디어, 코칭 그리고 기타 등등... 하고 싶었던 거 맘껏 못한 결핍을 채우듯이요.

청소년들의 변화를 기대하며 코칭을 진행하는데 친구들이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비전에 맞는 멋진 계획을 세우고 표현과 발표도 논리적으로 그렇게 잘하고, 와! 멋져부러~(웃음)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계획대로 가고 있다 싶다가 스르르...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무엇이 문제일까?’ 답답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한반도 종단 자전거 국토순례( 7박 8일 :770km)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자전거랑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제가, 자전거도 없어서 초등학생이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국토 대장정을 따라 나섰어요. 현실의 벽을 넘어 다른 세상을 돌았지요.

자전거를 한 시간 타고 10분 쉬는, 잠깐의 시간에 도로에 큰대자로 뻗어 흔들어야 일어나고, 식사시간에 식탁 밑에 들어가서 최대한 버티고 예의와 체면은 어디가고, 오로지 생존뿐인 7박 8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 달리는 것처럼 자전거를 타던 라이더들이 불만도 많았을 텐데 진행하던 안전요원, 진행요원 선생님들 고생 많으셨네요. 그때는 나만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평생을 장애로 살면서 함께 국토 대장정에 함께 참여했던 00는 ‘언니, 나 돌아 부럿어. 내가 돌아 부럿당게’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 하고, 참여하신 분은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엄지척!’을 하셨고 길도 나지 않은 새 자전거를 타고 일주일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청년이 마지막 날 ‘취업을 해야 하는데 답답한 현실에서 ‘나’를 찾고 싶어 참여했다’.는 등등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7박 8일의 국토순례 중 억수로 비가 쏟아져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던 순간, 뜨거운 태양으로 숨이 턱턱 막혀 왔던 순간, 페달을 돌리는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극한 상황을 체험 하면서 사람의 생존점을 느끼고, 드디어 ‘나’가 보이기 시작 하더라고요. 그 동안 사회의 통념과 성공이라고 정의 하는 틀에 내 생각을 맞춰가고  있었구나, 아이들은 각자의 성향과 방법으로 자기 삶을 성취해 가는데 이쪽으로 가야한다고 닦달하고 있었네. ‘기다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폭풍의 사춘기를 겪었던 우리집 둘째가
“엄마, 내가 돈 많이 벌면 자전거 타지마세요.”
“왜?”
“자전거 너무 힘들더라고요.”
아이의 호흡이 차분해지기 시작하더니 ‘공감’ 이 시작되더라고요.

엄마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소리 '그랬구나'를 듣더라고요. 운전을 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목표중심의 삶이 자전거를 타면서 과정중심으로 저의 시선이 바뀐 거지요. 자그마한 돌부리에도 넘어지는 자전거를 보면서, ‘사람도 조그마한 상처에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해와 공감이 시작 되고 아이와의 소통이 시작되었답니다.

저 스스로가 특별히 인류애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과거의 둘째를 통해, 현재 제 옆에 있는 아이들을 통해 과거의 나를 발견하기도 해요. 사람은 누구나 본인만의 아픔이 있는데, 해소할 기회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겪으면서, 밝아지고 위안을 얻고 삶의 활력을 찾아가는 엄마들을 보면서 자전거를 매개로 삶의 ‘지혜’를 배웠고 지금도 진행형인거 같아요.

이 자리까지 오는 중간 중간 쉼표 같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깊은 터널, 뜨거운 땡볕, 안개 속일 때도, 과정 과정에서 가족과 주변의 관심과 신뢰가 없었다면 현재의 저라는 존재는 없었거나 미미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초등학교 1학년 첫 번째 숙제
방바닥이든지, 땅바닥이든지, 배람박이든지 자기 이름을 다섯 번 쓰고 오너라.
방바닥이나 배람박에 연필로 쓰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손가락으로 써야한다.

숙제가 힘들지 않고 즐거울 수 있다는, ‘놀면서 배우자’ 개념의 선구적인 학습법 때문인 거 같아요. 역시나 선생님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 단체에서 자원활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십니다. 여덟 살에 첫 선생님으로 만나  인생의 멘토가 되셨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글을 써서 가져와서 읽어 보라고 그것도 선생님들 다 계신 교무실에서 읽으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이 시키니 안 할 수는 없고 얼굴이 화롯불이었지요. 목소리는 좋으나 주변머리가 없는 저를 음악선생님께서 부르셨어요. 그날부터 화성악 발성법을 일과가 끝나는 시간에 음악실에서 하게 되었지요. 복식호흡을 하지 않으면 등짝을 맞아가면서 배웠던 호흡법, 선생님은 어떻게 아실까? 그것도 뒤에서... 참 애들다운 뒷담화지요. 그때 배웠던 복식호흡으로, 동화구연을 하면서 원칙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어요.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매일처럼 운동장에서 체력장 연습을 하는데, 참고로 저는 고등학교 입학당시 체력장 점수가 20점 만점에 13점이었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고역이었겠어요.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도는 오래달리기를 하는데 우리학교에서 제일 빼빼하신 영어 선생님이 저희 뒤를 따라 달리기를 하셨어요.


"헉헉...선생님은 왜 따라 오셨어요?”
“너희가 처지기 시작하드라, 그래서 따라 왔지.”

거칠어진 숨을 내쉬면서 오랫동안 하늘을 본거 같아요. 내 호흡이 평안해 질 때까지... 그 후로 체력장 시간이 꼭 죽을 거 같지만은 않았어요.


세상에 남을 위한 삶은 없는 거 같아요.

제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순간순간을 이어 온 것처럼 저도 누군가의 순간에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평생을 고생으로 육남매를 키우셨던 저희 부모님, 아버지의 오랜 투병 생활동안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찾아와 어쩌다 저렇게 좋은 양반이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부지 심덕으로 자식들은 다 잘 될 것이여!. 안타까움과 덕담을 하셨지요. 

그분들 말씀처럼 우리는 아부지 덕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부탁한 일을 해라’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남을 위한 삶, 아니 배려하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지금은 제가 지향하고자 해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답답한 길에, 우리도 그러더라, 나도 그랬어! 공감의 길을 함께 가는 어른이고 싶습니다.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건데 버틸 수 있는 원동력

그만두고 싶다고, 내가 왜 이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질녘 천변에서 소리칠 때 많았죠. 다른 곳에서 일하자는 달콤한 유혹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아들 삼형제인 저보고 ‘목매달’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친구 같은 일, 그리고 아이들이 생활에 지치고 힘들 때 엄마에게 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위로가 되는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면 공감해야지요. 힘든 인생사, 인간관계,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닌
엄마의 삶을 보면서 시골 어귀 당산나무 같은 그런 모습!!

아이들은 잘 극복하더라고요. 하루는 셋째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엄마는 급여가 없는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등록금 면제 신청서를 냈는데 의료보험료가 많이 나와 확인 차 전화 드린다는 거예요. 저희 아이가 그렇게 얘기 하던가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이가 선생님께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나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무료급식을 해도 굶는 아이들이 많다는데.... 그래, 당당하게 꿈꿔라

하고 싶은 것 많고 자유로운 영혼, 나이 서른에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첫째.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치열하게 자기 삶을 개척하고 있는 청년 사업가 둘째.
환경공학과 졸업반 셋째.

1. ‘엄마, 용돈 좀 주세요’   
2. ‘엄마, 필요한 돈이 있는데 빌려 주세요’

저희 가족은 2번입니다. 대학입학이후로는 아르바이트로 스스로의 생활을 책임지고, 나이만큼의 몫을 하고 있는 아이들. 밖에서 자전거 탄다고 끼니 한번 제대로 챙긴 적 없는 것 같은데 서툰 엄마라고 탓하지 않고, 엄마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들입니다.

며칠 전에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셋째가 ‘엄마, 그 아버지가 61세 더라고요. 엄마도 61세 얼마 안 남았지요? 즐겁게 일하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것 많아 이것저것 생각 많은 내게, 엄마는 예뻤다는 말속에 이렇게 핵심을 끼워 넣더라고요. 그래서 다짐 했습니다. ‘아들 말을 잘 듣는 착한 엄마가 되자’

어디든 그렇겠지만 시민단체 안에서도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힘든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때론 말도 안 되는 상황과 말도 안 되는 말들....어떻게 이런 일이? 그럴 때마다 삼형제 여자 친구들... 그녀들과 잘 지내는 연습을 한다는 유쾌한 상상을 해요. 상대를 제게 맞추려하면 힘들지만, 제가 상대를 수용을 하면 편해지더라고요. 사람을 수용하고 이해한다는 건, 이해가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왜? 자전거를 타냐고요?

제가 건강 때문에 하고 싶었던 일을 못했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자는 아니었어도 훌륭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 아버지를 보면서 병상의 삶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봤기 때문이에요. 


스포츠 복지요. 모두가 즐거운...
햇볕, 건강, 환경, 교통 모든 것이 자전거 하나로 해결된다면, 자전거 탈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가요. 자전거가 정답입니다. 자전거 교실에서 안전수칙을 통해 리더십을 함양하고, 우울을 해소 정서적 안정과 세대 간 소통의 매개체 역활, 자연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자신만의 성공경험이 앞으로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수치로 환산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셋째가 중3이던 때 강진에서 광주로 청소년, 할머니, 아줌마 그야 말로 세대통합 자전거를 타는데 나주쯤이었을 거예요.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속도도 내지 못하고 컥컥되는 아들을 향해 ‘세윤아! 힘내~~’ 라고 소리를 쳤지요. 응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그러데요. ‘마지막 힘까지 다 내고 있는데, 힘내라고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왜? 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최선일수 있다.’ 교과서적인 지식이 오만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시민단체 운영을 통해 가게 된 길 사회적협동조합

자전거로 즐기는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방법을 몰라 길을 가면서도, 자다가도 그 생각에 빠져 있을때 지금 광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 이사장님으로 있는 이00을 만났어요.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살림’에 있으니 꼭 한번 들리라고 해서 정말 놀러 갔지요. 거기서 당시 팀장으로 있던 김00을 만나 낙서같은 이야기를 앞, 뒤 두서도 없이 했는데, 사업계획서가 되고 그해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되어 사회적경제에 진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2017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두바퀴랑위드 사회적협동조합를 설립하였어요. 비슷한 듯 다른, 다른 거 같은데 비슷한 시민단체와 사회적경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저도 배워가는 영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회원들과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또 빚을 집니다. 사랑의 빚.... 후에 갚을 날을 기대하며 응원해주세요. 사회적 경제기반으로 부~자 됩시다.

자전거를 통해 사회에 만들어가고자 하는 길은?

‘꿈’ 길이지요. 요즘은 ‘꽃길만 걸으세요! 라고 축원하는 말에 혹시 꽃을 피우기 위해 견뎌낸, 꽃의 시간을 보라고 하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중학교 1학년 동아리 활동으로 만났던 친구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주말이면 자전거 학교를 진행 하고 있는 시청으로 ‘선생님, 놀러 왔어요. 하면서 손을 보탤 때가 있어요. 이곳에 오면 항상 선생님 계시잖아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정 많은 친구들에게 ‘자전거 시민학교’ 그곳에 가면 소통도 하고 자전거에 필요한 정보 등 자전거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자전거와 고민을 이야기 하고, 그러면서 건강하고 올곧은  방향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요. 그리고 ‘그곳에 가면 선생님을 볼 수 있잖아요.’


많은 활동가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씀 한 마디 해주세요.

“밥 먹자!” 어려운 사람과 맛없는 밥 먹기, 정말 어렵지 않아요? 요즘 세상은 먹을 것이 충분한 세상 이다지만 밥을 먹는 다는 건 건강한 삶을 위한 기본이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음으로서 필연적으로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통해 내 옆에 있는 너를 확인하고 서로의 상황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넘어 네가 가는 길이 혼자 가는 길이 아닌 함께 길임을 알아가는 ‘밥 먹자’ 요. 어려운 문제, 난관에 부딪히면 밥부터 먹고 합시다. 좋아요!


자전거가 아닌 다른 일을 했다면?

애들한테 시대에 맞지 않는 잔소리 허벌라게 하는 왕따? 땀 뻘뻘 흘릴 때 부는 바람, 영산강 물위로 내려앉은 노을, 햇살에 반짝거리는 물비늘....사람 사는데 많은 것 필요하지 않구나, 자연이 저를 풍족하게 해줘요. 군더더기 없는 삶, 심플하게 해주는 요소이자 자전거를 통한 자연 감수성, 공감대 형성까지 자연과 나를 연결해 주고, 세상을 보게 하는 창 인거 같아요.

세상 쉬운 일도 없지만 어려운 일도 없고, 준비 없이 되는 일도 없더라고요. 하는 일을 통해서 ‘나’를 표현한다면,  바람이 치더라도 페달은 굴려야 하고, 그래야 정상에 설 수 있고, 내리막이라고 방심하면 넘어질 수 있듯이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겸손,  지속 가능한 삶 ‘나의 자전거’ 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그 동안 바쁘게 살다보니 나 자신을 정리하고 뒤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 걸어온 10년을 뒤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4차 산업 이야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대표님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네요. 정리가 되어 좋습니다.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인거 같아요. 주변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고, 지금의 제 모습은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비전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지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전거를 통한 세상과의 연결과 세상에서의 자전거를 통한 본인의 역할을 찾아 계속되어온 여정, 조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 있을 까 싶을 정도의 돌파력을 발휘하고 계시는 모습에 찬사와 함께 앞으로의 새로운 여정에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과정처럼 강인하게 돌파하시기 바라며.


활동가이야기주간2020 프로젝트의 '활동가인터뷰 공모 지원사업'으로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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