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란을 일으키러 온 사람들, 김지영+유다원

인터뷰 취지 : [활동가인터뷰]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인터뷰 글 등록일 : 2020. 3. 17

글쓴이 : 신비. 시민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다 2012년부터 [어쩌면사무소]라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해왔습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2018, 슬로비), <사람, 마을, 세계를 잇다>(2019, 아모르문디)를 썼습니다.


‘공동체' 또는 ‘마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쩐지 불편하다. 그 두 단어를 조합한 ‘마을공동체’는 더 그렇다. 그 언젠가, 너나없이 정을 나누고 서로 돕는 공동체가 우리 사이에 존재했으며 하루빨리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래도 그 신념에 공감할 수 없으니 불편하다.

그런데 여기에 ‘예술'을 더하면? 예술이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이라기보다 익숙하던 세상을 뒤흔들어 낯설게 만드는 작업으로 바라본다면, 이보다 더 전복적인 조합이 또 있을까 싶다.

“사람들이 저희보고 ‘좋은 일 하시네요’ 하는데, 저희는 사실 분란을 일으키는 작업, 틈을 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좋은게 좋은 거지’ 했던 거, 딴지도 걸어보고, 질문도 던지고, 가끔 소동을 일으키고 어떤 날은 민원을 발생시키는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 (유다원)

마을, 공동체, 예술, 이 불편하고 전복적인 개념을 가로지르며 서울 서쪽 목2동에서 ‘분란'과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두 사람, 플러스마이너스1도씨의 김지영, 유다원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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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유다원 (그림 제공: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모기동 사람으로 살기


여기서 지낸 지 꽤 오래되었죠? 요즘 지내기 어떠세요? 

유다원) 동네에서 사는 건 완전 좋죠. 안전하고 평화롭고. 사람들이 지방 가는 게 그런 이유일 텐데, 지금의 이 동네에서의 삶이 그래요. (집에서) 걸어서 한 십 분이면 여기 오고 사무실도 바로 근처고, 맨날 사람들과 만나서 놀고. 삶과 일과 놀이가 완전 일치되는 거죠. 그렇게 사니까 정말 좋아요.

 

그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당분간 계속 이렇게 지내실 예정인가요?

유) 글쎄요. 어떻게 할지 정해두지 않았어요. 저희는 목표를 정한다거나 정의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정의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김지영) 저희는 공공(새로운 예술)예술가라는 정체성으로 삶이자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주위에서) 초반에는 정책적으로 공공미술이라 부르다가, 마을이 활성화되니까 마을공동체로 엮다가 도시재생, 일상예술, 지역문화가 대두되면서는 또 다른 언어로 정의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자꾸 틀 안에 놓여 성과화 대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어떠한 틀에 들어가면 ‘여기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의미화하거나 정의 내려버리면 부담스럽죠. 이게 무슨 감정인지 저희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답답하고 그래요.


이곳에 온 게 벌써 10년 전인데요, 그때 지금 같은 그림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어떤 마음이었어요? 

유) 저희가 이 동네에 오기 전에 공공미술을 했어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술로 사람들과 만나는 작업을 했어요. 나름의 의미와 가치, 즐거움을 느끼며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 사업들이 진행되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 들더라구요. 마치 철새처럼, 여기저기 프로젝트 있으면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과 친해졌다가도 사업 끝나면 나와야 했는데, 그 지점에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공공이라는 개념이 되게 어렵게 느껴졌어요. 일 속에 내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같이하던 친구들 네 명이 나와서 카페를 열었죠.

 


공공예술의 기쁨과 슬픔 

공공장소에서, 대중적 또는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미술로서 공공미술은 꽤 오랫동안 건축물 외부 설치 조형물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공예술 지원 정책을 추진하면서 지역 및 주민들과 밀착하는 작업으로 본격화했다. 소외 계층을 주 대상으로 한 시범 사업 <아트인시티 프로젝트>가 좋은 평가를 얻자 이듬해인 2007년부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그 밖에도 안양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서울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등 대형 공공미술 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역 활동을 예술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접근방식이 확산한 것이다. 한때 너도나도 찾아가 사진을 찍고 방송을 타던 유명한 벽화 골목들, 방치된 낡은 건물을 개조한 예술공간 등이 바로 이런 공공미술 작업을 통해 탄생했다. 더불어 김지영, 유다원 두 사람을 공공예술가로 성장시킨 터전이기도 했다.

 
김)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이 많았어요. ‘지역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상상하다니!’ 할 정도로요. 예술가들이 미술관 바깥으로 나와 지역(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발생하는 어떤 케미(화학작용)이나 상호작용으로 예술적 표현을 해내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었어요. ‘예술이 일상에 존재해야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 갇힌 예술이 아니라 삶 속에 살아있는 예술을 추구하는 분들이 드러나고 영역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도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프로젝트 기간이 길게는 3년, 기본적으로 1년으로 끝났었죠.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해 문화를 생성하고 활성화 해놓아도 예술가들이 떠나면 잠잠해지기도 하고, 거기 남겨진 벽화나 조형물은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도 보았어요. 그렇다 보니 예술가들이 지역에서 자기 작업만 하고 빠져나간다는 식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었죠.

 
그러자, 이런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모인 예술가, 기획자들이 단체를 만들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후 앞길을 찾지 못한 채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가르치던 김지영, 연극을 사랑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전혀 다른 공부를 하며 시간을 쪼개 연극 제작에 참여하고 있던 유다원.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자원활동가로 서로를 처음 만났다. 알고 보니 동향에 동문인 데다 고민과 성향도 잘 맞아 급속히 친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전업으로 단체 일에 함께 뛰어들기까지 했다.

 
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일에 빠져서 재미나게 일했어요. 맨날 회사에서 자고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단체를 꾸리려면 아무래도 운영을 해야 하니까 한계가 늘 있잖아요. 공모사업, 용역 받아서 일하고 그러다보면 우리의 정체성은 좀 넣어두고 사업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고, 사업 내용도 그렇게 짜야 하는.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 개인의 삶도 없어지고,  현장에 대한 책임감이나 무거움 같은, 되게 복합적인 감정이 생겼어요.

김) 처음 만나는 지역이라도 짧은 기간에 이뤄야 하는 성과, 목표치가 있기 때문에 매번 A부터 Z까지의 프로세스대로 체계적이고 안전한 방향을 추구하며 일을 해야만 했어요. 관계맺음 또한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죠. 그 지역이 저희 삶의 터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오면 허탈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생각했죠.

유)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가 사는 곳에서, 관계 맺은 사람들하고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

 

그래서 그만두게 되신 거군요. 하지만 단체 일은 생업이기도 했을 텐데요.

김) 그때는 사업을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안 하고 싶었고, 기획 같은 기획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유) 기획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획자 병’에 걸리더라구요. ‘내가 다 할 수 있어’, 감히, ‘이 사람한테 이렇게 하면 될 것 같고 공간은 이렇게 만들면 될 것 같고 컨셉은 막 이렇고…’ 그런 병에 걸렸어요. 그걸 좀 놓고 싶었어요.

김) 저희가 있던 단체에서 지향했던 것도 예술가끼리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이 모여서 같이 협업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상상하는 집단이었어요. 예술가, 건축가 말고도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기자 출신까지 그렇게 섞여 있다 보니까 다양한 생각이 모이면서 일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기획, 그러니까 사람들 조직하고 계획해서 다음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뭘 해내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 욕구가 있는 이들이 모여서 관계가 맺어지면 거기서 나오는 필요로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다음 방향을 만들어가자고 했죠. 생전 해보지 않았던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 삶의 태도, 습관을 지워야 하는 일이기도 했어요.


카페라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요?

유) 공공예술 프로젝트 할 때는 주로 거점을 잡았어요. 거점 공간이 있으면 공간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하고 묻히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게 잘 없었는데, 지영이가 전시도 하고 시도 읽고 공연도 하고... 그런 카페 같은 걸 만들면 좋겠다고 해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친구들 넷이 같이 나와서 두 달 동안 공간을 만들었어요. 다들 공간 만드는 작업을 해본 터라 디자인이랑 시공도 직접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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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숙영원 내부 (사진: 숙영원)

 

그리고 한 1년 동안은 카페 운영만 하셨다고요. 

유) 초창기에 카페가 생각보다 잘 되긴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 일만 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 상황에서 친구들이 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 좀 달랐어요. 넷 중 한 명은 가볍게 결합한 정도였고, 나머지 셋 중에서 한 친구는 애초에 하고 싶었던 동네에서의 활동, 문화기획, 이런 걸 좀 일찍 시작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우리 둘은 최대한 버티다 못해 터져 나올 때 하고 싶었어요. 속도가 다른 걸 처음 경험해봤어요. 저 사실 되게 빠른 사람이거든요. 좋아, 하면 가는, 그런 캐릭터인데, 그때 처음으로 속도가 늦은 사람이 되었죠.

 

왜 그랬을까요?

유) 카페 운영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서, 그것만으로 너무 벅차기도 했구요. 무엇보다 기획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발현되는,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이 나오는 걸 기다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암묵적으로 셋 다 말을 안 했어요. 아니 몰랐어요. 그때는 이런 마음인지 몰랐고 지나서야 알게 된 거예요. 셋이 이 좁은 공간에 앉아서 되게 힘들어했어요. 속도의 차이라는 걸 그땐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한 친구와는 헤어졌죠. 그렇다고 관계가 끊어지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둘이서 그냥 버텼어요. 1년쯤 지나니까 너무 심심해서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고요. 우리가 올해로 15년 차 친구인데, 정말 그 15년을 통틀어 그때 제일 많이 싸웠어요. 둘 다 불행한 거죠. 이걸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그게 막 여기(턱을 가리킨다)까지 차올랐을 때, 나무도예방이라는 공방 분들에게 하소연을 했어요. 가끔 밥 먹으러, 술 먹으러 오던 동네 손님이었죠.

 


모기동을 발견하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전에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왜 이 동네였을까? 이곳저곳 떠돌며 ‘치고 빠지는' 활동은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은 후 찾아간 동네라면, 뭔가 꼭 그곳이어야만 할 이유가 하나쯤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까 왜 여기로 오신 거예요?

김) 그냥 진짜 알아보다가. 여러 군데 가 봤어요. 은평도 가보고, 성산동도 가 보고. 그러다 우연히 여기 왔는데 붉은 벽돌의 단독주택이 여전했고, 집 앞에 화분도 놓여있는 골목이 살아있는 동네였어요.  “여기 참 괜찮다” 하며 큰 뜻 없이 들어오게 됐어요. 

유) 사람을 가까이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일단 1층이고, 알고 보니 안양천도 가깝고 산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정말 그냥 우연히 만났다고 봐야겠네요. 그게 십 년 전인데요, 처음 찾아낸 그 공간에서 여태 그대로 머물고 계신 건가요?

유) 그렇죠. 이 건물 어르신들이 굉장히 호의적이세요. 10년 동안 한 번도 월세를 안 올리셨어요.

김) 저희 들어올 때 신축건물이었어요. 저희는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어르신들과 자녀들, 그 아이들 그렇게 3세대가 이 건물 위에 살아요. 카페 오픈했던 바로 그날 할머니가 식구들 다 데려와서 인사시켜주시고 그랬어요.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그 후로도 일부러 내려와서 커피 사드시고 그러셨죠. 나중에 저희와 축제를 열었을 때는 음식도 만들어 팔면서 축제 분위기도 만들어 주시고 함께 즐기셨어요. 재료비도 안 남게 잔뜩 넣어서...

  

들으면 들을수록 이 동네여야 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동네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야 할 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골목이란 골목은 다 들썩이던 시기에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는 소상공인과 건물주들이 있었고, 기획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판을 누릴 줄 아는 주민들이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던 두 사람의 옆구리를 살짝 찔러준 나무도예방 사람들처럼.

김) (1년 정도 지날 무렵) 나무도예방 샘들에게 말했죠. 하루 12시간 쉬지 않고 문을 여니까 너무 심심하고 괴롭다고. 그랬더니 “그래? 그럼 우리 뭐 해볼까?” 하시더라고요.

유) 그래서 열었던 게 2011년 첫 번째 축제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동네에서 우리만 심심했던 게 아니었던 거죠. 나무도예방 샘들이 지역아동센터나 어린이책시민연대 같은 곳에서 지역 활동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을 좀 알았어요. 그런 분들, 그리고 카페 왔던 단골들, 눈여겨봤던 분들에게 신청도 받고 해서 한 20팀이 참여했어요. 마을공동체 사업도 시작하기 전이어서 골목에서 그런 걸 하는 게 생경했을 텐데, 놀러 와보니 생각보다 사람도 많고 재밌었나 봐요. 우리가 뒤풀이하자고도 안 했는데 책상 다 붙이고 앉았더라고요. 알아서 막걸리 사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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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동 마을축제 풍경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김) 축제가 사실 진짜 허술했는데… 사진으로 보면. 정말 못생겼어요.

유) 문화하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그냥 있는 거 가져다가 오리고 칠해서 쓰고, 그런 식. 그래도 음악이 있어야지 하고 인디 가수를 불렀는데 세상에 마이크 스탠드도 준비를 안 해가지고 급히 만들고, 이웃 우유집에서 박스 빌려다가 아트마켓 부스 만들고 그랬어요.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행사 기획에서는 프로들이실 텐데요.

유) 일부러는 아니예요. 처음 준비할 때는 아니나 다를까 우리 습관이 나오더라고요. 그 작은 행사 하는데 기자 연락처 다 찾아서 보도자료 쓰고 있고. 그렇게 하니까 너무 할 일이 많고 힘들었어요. 둘이 막 밤새워서 그러고 있는데 (나무도예방) 샘들이 와서 그러시더라고요. “얘들아 그냥 우리끼리 행복하게 하자. 우리가 행복하면 함께하는 사람들도 행복할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무장해제가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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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축제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겉모습은 ‘못생기고 허술'했다는 첫 번째 축제가 동네에 가져온 변화는 작지 않았다. 뭐든 빈구석이 있어야 새로운 시도와 상상이 가능한 법. 골목에서 인형극을 관람하는 아이들을 뒤에서 바라보던 주민들은 위험하다고 타박하기보다는 직접 나서서 안전띠를 두르는 방법을 택했고, “다음에는 길을 막고 해야겠다”라며 대안을 내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게 참여한 이들이 다 같이 모여 다음 축제를 준비했고, 참여자가 점차 늘면서 해마다 모기동 축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동네 일'로 자리잡았다. 물론, 두 사람에게도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다.


유) 첫 번째 축제를 하고 나서, 그 기억이 너무 좋은 거예요. 어찌 보면 이 동네에서 같이 노는 게 시작이었어요. 우리의 시작. 이미 같이 놀던 분들이 계셨지만, 우리까지 포함해서 같이 논 건 처음이었고, 우리도 그동안 공간을 꾸리는 것만 해왔다면 안에서 밖으로 확장되는 게 처음이었던 거죠. 너무 재밌었어요. 저는 아직도 제일 기억나는 축제는 첫 번째 축제예요. 

김) 공식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자’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그 축제를 기점으로 하나씩 하나씩 (우리의 일을) 하기 시작했죠. 플러스마이너스1도씨라는 이름도 그때 만들었어요. 비영리단체로 등록도 하고. 카페로는 그런 일을 하기 어려우니까요.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 지구의 온도는 1℃ 낮추고 사람(사이) 온도는 1℃ 올리는 사람들

이웃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 있는 카페 숙영원, 1년에 한 번 주민들이 직접 준비하고 즐기는 모기동 축제, 그리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실험하는 문화예술기획의 틀인 플러스마이너스1도씨(플마)가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모기동의 온도는 서서히 올라갔다. 마침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추진하면서 공모사업이나 교류의 기회 등 활용할만한 기회가 늘기도 했다. 원하는 강연을 열어 함께 공부하고,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주민들은 급속히 친해졌고 서로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매년 축제를 거듭하며 지역 사회에서 교류의 폭도 점차 넓어졌다. 어찌 보면 신기할 정도로 별 탈 없이, 모기동 주민들은 다정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며 마을을 일구어갔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 적어도 4년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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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동 주민 활동의 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페 숙영원, 현 협동조합카페마을.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유) 늘 겨울은 어려운 계절이었어요. 겨울이 되면 활동이 거의 다 잠잠하고 카페는 점점 안되는 것 같고. 해가 갈수록 원래 하던 문화예술일이 늘어나면서 카페 문을 닫는 날이 늘었어요. 돈을 벌지 못해도 운영은 되는 정도였는데, 저희가 카페 일 자체를 좋아했던게 아니다보니 있던 메뉴도 줄이고… 그러니까 (매출이) 점점 하강곡선을 그렸어요.

김) 카페인데 맨날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회의하고 있고 강의하고 그러니,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문턱이 높아지기도 했어요.

유) 카페는 점점 내려가고 플마 일은 좀 올라가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사람들한테 입버릇처럼 카페 문 닫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희만 이렇게 우울한 게 아닌거예요. 2014년 그해도 엄청 축제를 크게 하고 났는데 다들 모여서 ‘하..’, 이러는 거예요. 뭔가 너무 힘들다. 커진거 같고 늘어난 것 같은데, 그래도 결국은 각자 분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분투해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유) 일단 저희는 집 문제가 컸어요. 동네 전세가 갑자기 1억씩 오르더라고요. 지하철 9호선 급행역이어서 교통이 좋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어떤 상가는 월세가 200만 원 올랐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축제나 단기적 프로그램으로 그치지 않고) 동네에서의 지속적인 교육, 예술, 문화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동네에서 활동하는 단체, 혹은 개인들과 좀 더 긴밀하게 대화해 보자 했어요. 

김) 그전에는 축제 운영을 위한 협력만 있었고, 각자 생존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2015년쯤에는 이 삶을 좀 단단하게 만들 구조를 고민해봐야겠다! 하는 문제를 커뮤니티 단위들과 나누기 시작했어요. 힘을 모아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 그게 뭘까, 이야기하게 된 거죠.

유)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마침 사회적으로 공동주택이니 셰어하우스니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우리도 그럼 공부라도 하면서 논의해보자 했죠. 그 공부 모임을 서울연구원 시민연구사업으로 내서 진행했어요.

저희가 이 동네에 와서 바뀐 게 바로 이거예요. 예전에는 공모가 나오면 그때 (내용에 맞게) 썼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를 닮은 일이 나오면 참여해요. 정책은 계속 만들어져서 뿌려지지만, 우리가 그걸 대하는 방식이 바뀐 거죠. 우리를 닮은 일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으니까. 서울시 마을예술창작소가 그런 사업이었어요. (이 사업에는 카페 숙영원과 나무도예방이 공동 참여했다.) 덕분에 서울 전역에 현장 동료가 많이 생겼어요. 그리고 저희가 고민하던 마을교육 관련해서는 <마을학교 상생프로젝트>라는 사업이 이 서울시 마을종합지원센터에서 나왔어요. 신기하게도. 그렇게 2015년이 우리에게는 좀 전환의 시기였어요.

 

그 전환의 시기를 거치는 사이, 모기동에는 무려 세 개의 협동조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립되었다. 주거 문제로 고민하던 주민들의 공부 모임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주택협동조합으로 발전했고, 조합이 운영하는 첫 번째 공동주택 <함께사는 집, 뜨락>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마을교육을 고민하던 이들은 ‘모기동마을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고, 카페 숙영원은 마을 사랑방 공간을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주민들이 이어받아 ‘협동조합 카페마을'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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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협동조합이 활동 1년 만에 마련한 공유주택 ‘함께사는 집 뜨락'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뭐라도 해볼까'로 시작한 조그만 축제가 끌어들인 에너지는 불과 몇년 사이에 스스로 성장하고 전환하며 주민들의 삶을 크게 뒤집어놓았다. 막연히 상상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흩어져있던 자원이 한데 모여 구조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때로 두렵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낯선 갈등이 주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김) 2년 사이 3개의 협동조합이 생겼는데, 그중에는 협동조합이라는 틀이 맞지 않는 활동도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협동조합은 각자의 자발성, 주체성을 가지고 모여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만들어야 했던 거더라구요. 우리 커뮤니티가 지향하는 협동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논의도 하기 전에 이미 설립 돼 버리니까. 의견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조합이 설립되었으니 이럴 때 사업을 빨리 추진해나가야지 하는 분들도 계셨고, 조합원 간의 의견을 모아 천천히 방향성을 세우며 가자는 의견도 있었죠. 그리고 이렇든 저렇든 무관심자들도 있었고요.

협동조합이 좋은 뜻만 있고 이게 내 일이라는 의식이 없어서는 곤란한 것 같아요. ‘당신들이 한다고 하면 내가 도울게요.’ 이런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는 거죠. 또한 이사장이나 임원으로서 직책을 가진 이들이 자기 뜻대로 조합원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다그치거나, 독단적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유의해야 하죠. 조직의 가치만 존재할 뿐, 설립 조합원 개인 개인들의 욕구와 필요가 그 안에 투영되지 못한 조합은 운영상의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유) 돌아보면 우리 동네의 속도가 아니기도 했고, 근대적 교육을 받아오며 리더가 이끄는 것에 따라가는 방식에 익숙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나서서 강하게 주장하고 정리하면 따라가는 식으로. 그런데 동네에서 삶과 일이 순환되는 방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저희가 계속 사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 있는데, 동네에서 일어난 나름 크고 작은 일 모두 저희 둘만 있었으면 절대 이렇게 해 오지 못했을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다들 각자 자기 책임을 갖고 움직이니까 가능했죠. 내가 죽을 것 같다며 하루 쉰다고 멈춰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공공미술 할 때 항상 그게 고민이었거든요. 전문가가 나가면 사라져 버리는 현장, 이게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요. 모기동에 들어와서 동네 축제를 경험하고 더 절실하게 느꼈어요. 저희가 축제의 주 기획단으로 5년을 달리다가 2015년 들어서 더는 못 하겠어서 멈추었는데, 그 후 방식과 주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축제는 계속되고 있어요. 이제 당일에 스탭으로 자원활동 정도만 하고 그러는데도 다 운영이 돼요. 축제가 동네 문화가 된 거죠. 저희는 또 다른 문화 축제를 기획할 수 있게 되었고요. 활동은 그렇게 주체성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계속 생성시키고 서로 힘 보태면서 같이 굴러가는 거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런 움직임을 조명하고 같이 만나고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각자 외롭지 않게, 망하지 않고 오래 갈 수 있게.

 

더 넓고 다채로운 관계망을 향해

마을에 휘몰아친 갈등 그 자체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성실하게 그 어려움을 마주하는 사이 주민들은 오히려 성장했다. 어쩌면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설레는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현실감이 느껴진다. 2015년에서 2017년 무렵까지 이어진 그 겨울이 단지 시련의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건 지금 그들이 모기동 밖으로 더 넓고 다채롭게 엮어내고 있는 관계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 2014~2015년에 예술가들과 함께 <CITY GAME>이라는 새로운 작업을 했어요. 동네가 익숙해진 만큼 낯선 시선이 중요하다 싶어서 작가들과 동네를 엄청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공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버려진, 비어있는 것들을 우리가 사용해보고 싶다 하는 다소 엉뚱한 상상도 했죠. 

김) 뒷산 위에 폐가가 하나 있더라고요. 수도사업소 관사였다는데 몇 년째 빈 채로 방치되어 있었죠. 그 공간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좀 쓰면 안 되나? 하고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녔더니 구에서 예산을 마련해서 청년들의 문화예술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사업 공모를 냈어요. 그래서 저희가 제안서를 내고 선정되어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2년 동안 산 위에서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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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 문화예술플랫폼 <청춘마루>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유) <청춘마루>라는 공유공간이에요. 공간 운영하면서 문화예술 활동을 주로 했어요. 용왕산 공간을 활용해 ‘별헤는 밤’이라고, 마을축제와 다르게 문화예술에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밤까지 즐길 수 있는 축제도 하고 ‘산위의 인문학’이라는 공부하는 자리 등등. 그러다 보니 원래 카페가 있었던 골목에서 노는 일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죠. 2년 정도 그렇게 있는 사이에 동네에 이제는 저희가 속해있지 않은 동아리, 모임, 공간이 되게 많아졌어요. 골목에 새로 생기는 공방도 늘고 있고요. 공방을 운영하다 보면 공간에 고립되기도 하는데, 발 넓은 분들이 계셔서 서로 초대하고 만나고, 반상회를 계속하면서 교류하고 있어요. 그렇게 자기 문화가 생기더라고요.

 

2년 만에 다시 골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이제 이렇게 스스로 자라난 동네 문화를 함께 누리고 돌보면서, 모기동을 넘어 양천구 전체를 오가는 문화예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18년부터 양천구 곳곳에서 활동하는 사람, 공간, 단체를 찾고 만나고 기록했고, 2019년에는 그동안 만난 공간과 사람들을 소개하고 서로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활동이 좋은 자극이 되었는지, 그 사이 지역 내 공방들이 함께 기획한 아트마켓 <느긋한 시장>, 양천구내 골목책방들이 교류하는 <책팜>이라는 행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2019년 11월, 플러스마이너스1도씨는 지역 내의 이러한 활동을 폭넓게 조망해볼 수 있도록 <라이프가드닝위크>라는 문화축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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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가드닝위크 2019 (그림: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좀 시끌벅적한 삶’이 가능한 마을이기를


딱히 ‘다시 돌아왔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찬 모습인데요, 그래도 동네에서 새삼 느끼는 위화감 같은 게 있을까요? 

유) 뭐랄까, 좀 흉흉해진 것 같아요. 그동안, 이 골목에서 축제를 해도 민원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내려와서 보니까 노래를 조금만 크게 틀거나 해도 민원이 막 들어와요. 물론 아이를 재워야 하거나 밤에 일하는 분들한테는 죄송스러운 일이긴 한데… 엊그제는 작은 행사를 했는데 경찰차가 두 번이나 왔었어요. 서운한 마음에 데시벨 체크해 봤더니 70도 안 넘어요. 일반 생활소음 기준치에 그리 웃돌지 않는 수준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아, 더 열심히 놀아야겠다. 그동안 너무 안 놀았구나.’ 생각했죠. 


어찌 보면 그동안 민원이 별로 없었던 게 신기한 것 아닌가요?

유) 그러게요.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최근에 좀 다녀보니까 주민 구성이 좀 바뀐 것 같아요. 지하철로 여의도,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젊은 층이 많이 유입된 것 같아요.

 

그런 분들과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봐야 하려나요? 

유) 아직은 모르겠어요. 다양하게 놀기도 모이기도 해봐야 알 것 같아요.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고, 그래도 좀 시끌벅적한 그런 날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허구한 날 그러면 소음이지만 띄엄띄엄 하루, 하루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위축되기도 할 거고, 싸워야 하는 순간도 생길 거고요. 

유) 이제 저희는 누가 뭐래도 동네 사람, 모기동 사람이니까. 동네 활동은 숨 쉬듯 이루어지는 일상이 되었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어울리다 보니 크고 작은 사건, 갈등이 있지만 이런 시간이 쌓여 즐길 줄 아는 건강한 시민이 되는 것 같아요. 아직은 건강하게 주장하고 토론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종종 마음도 전쟁 같고 그러긴 하는데, 저희는 좀 더 시끄러워지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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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카페마을 앞 공연 (사진: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예술이 되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인 줄로만 아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람들이 저희보고 ‘좋은 일 하시네요’ 하는데, 저희는 사실 분란을 일으키는 작업, 틈을 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좋은 게 좋은 거지’ 했던 것에 딴지도 걸어보고, 질문도 던지고, 가끔 소동을 일으키고 어떤 날은 민원을 발생시키는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들이고. 그걸 참고 있던 누군가가 “아 불편해!” 하면 “왜 불편해요?” 라고 묻고, 드디어 얘기할 수 있는 자리와 꺼리를 던지는 사람들이죠. “너네 시끄럽잖아”, 하면 “그런데 우리 가끔은 이렇게 같이 놀 순 없을까요?” 라고, 마주 앉아서 대화를 시작하는 거죠.

두 사람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보니, 여전히 모두가 서로를 돕는 아름다운 공동체란 환상일 뿐이라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든 변화는 마주 앉아서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일어난다는 생각에는 공감이 간다. 환상을 쫓기보다 도리어 딴지를 걸고 소동과 분란을 일으키는 골치아픈 작업을 내가 사는 일상 속에서, 가깝고 먼 이웃들 사이에서 지긋이 이어나가는 것. 지배나 억압이 아닌 대화를 통해 공존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마을공동체 활동의 본질이라면, 나는 공동체라는 것에 이전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란을 기꺼이 겪으며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모기동 주민들의 모습을 다음 십 년 동안에도 꾸준히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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