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 차이를 아는 디자이너, 김보은

인터뷰 취지 : [활동가인터뷰]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글 등록일 : 2020. 2. 7

글쓴이 : 재은.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종이 한 장 차이를 아는 디자이너, 김보은

세면대와 화장실에서 바다를 떠올릴 수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화장실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변기는 바다의 입이다. 집집마다,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바다의 입'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가? 

이문재,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 (작은것이 아름답다 267호 '바다') 

 

주변을 둘러보면 갖가지 종이가 넘쳐난다. 인상 깊게 본 영화 포스터부터 노트와 책, A4 종이가 쌓여있다. 종이는 나무를 베는 것에서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바다를 떠올린다면, 책상에서 숲을 생각한다. 화재로 숲이 불타고 야생동물이 죽는다는 뉴스가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종이 한 장을 쓰더라도 지구에 덜 해로운 방식이 가능할까. 생태적 가치를 지향하는 곳에서 일을 할 때 홍보 브로셔를 만든 적이 있다. 브로셔 디자인을 맡은 라운드트라이앵글은 인쇄를 넘기기 전 가장 중요한 단계가 있다고 했다. 인쇄 종이 고르기였다. 재생지와 산림인증마크가 찍힌 종이 묶음(샘플북)을 보여줬다. 어떤 종이에 인쇄하는가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종이의 다양한 세계를 엿본 기분이었다.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자연을 생각하는 디자인을 한다는 것. '종이 한 장'에 담긴 마음을 듣고 싶어 라운드트라이앵글 대표 보은님의 작업실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가까운 도시 한복판, 후암동 골목길을 걸어 도착했다. 먼 길 왔다며, 오랜만이라며 서로 반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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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은 (출처: 김보은)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보은님은 기업 제품 광고, 영화 포스터 등을 만드는 디자이너였다. '조금 더 가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이 생겨 대학원에서 그린디자인을 전공했다.

 

디자인에 언제부터 흥미를 느꼈어요?  

"중학교 때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노트 한 권에 옷을 그려서 친구랑 주고받았어요. 교환 일기처럼.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디자이너를 꿈꿨어요." 

 

꿈을 이루셨네요.   

"그러네요(웃음).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회사를 다녔어요. 디자인 에이전시라고 말하는, 대기업 광고를 만드는 회사요. 제품 광고를 하는데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부분을 작게 처리해야 할 때가 종종 있어요. 저는 광고를 만드는 디자이너이기도 하지만 소비자이기도 하잖아요. 소비자가 아닌 대기업을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조금 더 가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생겼어요." 

 

고민을 가진 채로 얼마나 일을 했어요?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5년 정도 일했죠. 영화 포스터 만드는 일도 했거든요. 영화 포스터를 제작하려면 시나리오 북부터 만들어요. 영화를 글로 먼저 보는 거죠. 제 나름대로 비주얼이 떠오르며 구상한 장면을 영화로 다시 보면 신기하고 좋더라고요.  

작업 자체는 재미있었는데 영화 포스터를 극장에 보내니까 엄청난 수량으로 만들어요. 사람들은 영화 보고 나서 쉽게 버리거든요. 엄청난 양이 금방 쌓여요. 종이 쓰레기를 보면서 생각했죠. '내가 쓰레기를 만드는 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린디자인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갔어요." 

 

제품 광고에서부터 영화 포스터까지 여러 디자인을 하셨네요. 

"다른 작업 같아도 디자이너에겐 비슷한 작업이에요. 나한테 주어진 과제를 잘 풀어내는 게 중요해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죠.”

 

대학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고민은 없었나요? 

"서른이 넘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간 거였으니까 고민했는데요.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크게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에요(웃음). 디자인이라는 게 소비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잖아요. 이걸 사도록, 보도록 만드는 일이니까요. 소비되고 금방 쓰레기가 되기보다 내 디자인이 가치 있게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변화를 가져온 그린디자인 

그린디자인 전공 과정에서 삶에 영향을 주는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 

  

그린디자인 전공에서 어떤 것들을 배웠어요?  

"저는 시대와 맞는, 트렌디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걸 배우고 싶었는데요. 환경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원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요. 그래픽 디자인을 해왔는데 그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전공을 가진 사람들과 하게 될 다양한 디자인이 궁금했어요. 

기대했던 바와 다르긴 했어요. 환경에 대한 의식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죠.(웃음) 결론적으로 의식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계기가 됐고요. 지도교수이신 윤호섭 교수님을 보며 ‘정말 멋지다, 나도 나이 들어서도 디자이너로 살고 싶다’는 모델이 생겼죠. 지금은 국민대에서 그린디자인 과정이 없어져서 아쉬워요."  

 

공부하면서 어땠어요?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활동’으로 이어가진 않았어요. 4대강이 이런 문제가 있대. 어떡하냐며 혼자 분노했던 사람 중 하나였죠. 공부하면서 제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전공으로 만난 사람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 신념, 생각을 얘기해요. 내가 내 목소리 내는 것에 두려워한 게 아닐까. 내 방식대로 조금은 유연하게 전달하고 싶어졌어요."  

 

전공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도 있나요?   

"좋은 인연을 만난 게 가장 큰 성과예요. 핫핑크돌핀스 대표도 그린디자인 전공에서 만났어요. 핫핑크돌핀스는 돌고래를 보호하는 활동을 주되게 해요. 우연한 기회로 대화하며 정말 신기했어요. 대학생 때 자기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수업에서 저는 저를 고래라고 지을 정도로 바다를 좋아하거든요. 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작업하게 되었어요." 

 

딴 소리지만 저도 작년에 수영을 배우면서 '물맛'을 알았는데, 바다는 또 다르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어 바다에 갔는데 전혀 다르잖아요. 발이 안 닿으니까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프리다이빙을 배웠어요. 바다가 좋아졌어요. 프리다이빙은 바다 깊은 아래로 내려가거든요. 한 10미터 정도 내려가면 중성부력이라고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자기 부력에 딱 맞는 곳이 있어요. 더 깊이 내려가기 전에 수심, 수압에 익숙해지기 위해 거기서 1분 정도 가만히 있거든요. 그때 기분이 진짜 좋아요. 우주에 있는 느낌이에요. 바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명상이랑 비슷해요." 

 

망망대해에 혼자인 느낌, 왠지 알 것 같아요. 

"발이 안 닿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이빙을 배우게 됐는데요. 정말, 발이 안 닿아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몸에 힘을 풀면 안 가라앉는다는 걸 알아요. 내가 몸에 힘을 주니까 가라앉는 거지 물에 맡기기만 하면 가라앉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진짜 자유를 경험해요."

 

바다에서의 경험이 디자인으로 연결되기도 하나요? 

"바다에 가기 위해 일을 하죠. 이걸 끝내야지 가니까. 돈도 벌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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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 가운데에서 (출처: 김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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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핑크돌핀스 로고 (출처: 김보은)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라운드트라이앵글

대학원을 졸업하고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라운드트라이앵글을 만들었다. 어느덧 6년 차, 환경과 도시 그리고 지역에 대해 목소리 내는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도 중이다. 

 

대학원 졸업하고 라운드트라이앵글을 만든 거예요?  

"네, 2015년에 동생이랑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었어요. 동생은 건축디자인을 전공했어요. 동생은 도시와 사람에, 저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서 ‘라운드트라이앵글'이라 이름 지었어요. 디자인을 가운데 두고 환경, 도시, 사람으로 둥글게 아우르자고요. 도시나 지역에 관한 활동을 하고 싶어 해방촌 마을 기록단 작업을 하고 있어요." 

 

벌써 6년 차네요. 이런저런 고민도 있겠어요.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그동안 조금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핫핑크돌핀스를 비롯해 환경단체 등 가치에 동의되는 단체의 브랜드를 이미지로 작업했죠. 작년에 생각이 조금 변했어요. 직접적으로 항의하거나 목소리 내는 사람들로 인해 변화가 이루어지는 걸 옆에서 봤거든요." 

 

어떤 변화를 봤어요?   

"기업에 배달 쓰레기 문제를 항의하는 모임에 참여했어요. 일이 바빠져서 저는 거의 참여를 못 했는데요. 참여한 사람들이 항의 메일을 보냈어요. 기업에서 바꾸겠다는 답메일이 오는 거예요. 작은 거라도 변화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문한 책이 환경에 덜 해로운 패키지로 배송이 온 거예요. 직접적으로 얘기하니까 바뀐 거죠. '이거다' 싶은 느낌이었어요. 이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 작업에 녹일지는 저희 숙제예요.” 

 

직접적으로 목소리 내는 디자인일까요?  

"이야기에도 여러 층위가 있고 목소리도 다양하니까요. 환경캠페인에서 피 흘리고 죽어가는 동물의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충격을 받았죠. 충격적이니까 그다음을 생각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비주얼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지만, 강한 자극을 만드는 건 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목소리 내는 건 필요하죠.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어우러지면 되지 않을까요? 저희는 이야기 건네는 방식으로 디자인하고 싶어요. 문턱 낮은 입구처럼요.” 

 

 

선택지를 넓히는 디자인 

라운드트라이앵글은 최근에 '종이 한 장 차이'로 펀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디자이너로 일을 해오며 인쇄 기술이나 종이에 대해 쌓인 노하우를 풀어낸 책이다. 

 

펀딩 사이트에서 '종이 한 장 차이' 책을 봤어요. 

"주변에서 재생종이 뭐 쓰면 좋냐고 많이 물어와서 저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잘 풀어내고자 썼어요. 환경에 관심 갖게 된 것도 영화 리플릿 종이였고요. 나무를 베어야 종이가 만들어져요. 숲이 오래오래 유지되도록, 실용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샘플북 보는 방법부터 환경인증마크가 어떤 의미인지. 종이 한 장에 나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요. 결국 우리의 선택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는 책이에요." 

 

종이 한 장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조금 더 설명해주실래요?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작지 않아요. 나무가 종이가 되기까지 자라려면 10년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거든요. 재생종이는 나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종이의 원료가 될 수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는 만큼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죠. 우리나라 한 해 종이 소비량의 10% 정도만이라도 ‘재생펄프가 40% 함유된 재생지’를 사용한다면, 하루에 약 2만 6천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어요.”

 

그럼에도 디자인이란 업무 자체가 의뢰받아서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내가 지향하는 바와 다를 때가 많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못 할 때가 더 많아요. 저는 ‘이게 맞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답을 갖고 있진 않아요. 지금 주어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고민해요. 의뢰인에게 예산이 많지 않은데 모조지 보다 값이 비싼 재생종이 쓰자고 할 수 없잖아요. 

예산 범위 안에서 협의할 수 있게, 여러 선택지를 만들어두는 거예요. 재생지가 안 되면 산림인증 종이 등 선택지를 만드는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요.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이런 질문 해도 될까요? 의뢰 일은 많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만큼요.(웃음) 지금까지는 단체라든지 비영리를 추구하는 곳, 기관에서 의뢰받는 일을 했어요. 올해는 저희 작업을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저는 한 가지 이슈에만 묶이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들을 더 많이 디자인하고 싶어요. 좋은 디자인을 하는 게 목표예요. 물건을 살 때 이성적인 부분보다 감성으로 접근해야 구매로 이어진다고 하잖아요. 저희가 만든 걸 샀는데 친환경적인 거죠. 좋다고 설명할 필요 없이 사고 보니 환경적인 게 당연한 기본이 되는 거요. 

또 제가 물건을 좋아해서 미니멀 라이프가 안 돼요. 물건을 못 버리거든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고 실제로 제작하고 싶어요. 내가 가진 물건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그것을 소비할 때의 의식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도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잘 전달해서 신중하게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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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 차이 (출처: 김보은) 

 

내가 일하던 곳의 브로셔를 보은님과 함께 만들면서 배운 점이 많다. 홍보 담당자가 어렴풋이 윤곽을 잡고 있는 것을 실제 이미지로 구현하는 사람이 디자이너라는 것. 그녀는 상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사업 흐름을 세심하게 캐치했다. 인쇄 종이의 차이를 살피면서 자연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보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보다 나은 선택을 대화로 풀었다. "이렇게 해볼까요? 저렇게 해볼까요?" 조근조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이어졌다. 가끔은 내가 더 많은 말을 하기도 했다. 보은님은 내 말을 들으며 잘 웃었다. 중간중간 사적인 이야기도 나눴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눈빛도 기억난다. '종이 한 장의 차이' 책을 펀딩 하면서 직접 목소리 낸다는 설렘도 전해졌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나하나하고 있는 보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마치 바다 깊은 곳에 머무는느낌이었다. 그곳에서 홀로 멈추어 있던 보은님의 시간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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