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쌓으며 자기를 발견해온 사람, 윤지현


인터뷰 취지[활동가인터뷰]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활동가이야기주간] 전까지 꾸준히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활동가이야기주간]은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활동을 통한 변화 사례를 공유하기 위한 전국적인 대화 모임 주간으로 2019년 11월 4일(월)~8일(금)까지 5일간 전국 곳곳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인터뷰 날짜
글쓴이신비. 시민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다 2012년부터 [어쩌면사무소]라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해왔습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2018, 슬로비), <사람, 마을, 세계를 잇다>(2019, 아모르문디)를 썼습니다.


2014년 겨울, 우리는 커다란 펼침막을 들고 서울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시의 제안으로 시작해 시민들이 직접 만든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제정을 시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인권활동가, 분야별 전문가, 그리고 시민 백여 명이 반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일구어낸 소중한 결실을 이대로 묻히게 할 수는 없었던 시민들은 원래 선포식을 할 예정이던 12월 10일 세계인권헌장 기념일에 맞춰 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때 회견문 준비와 언론 소통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소속 활동가인 윤지현이 맡았다. 준비 과정과 현장에서 보여준 그의 차분한 판단력과 실무능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두어 해가 지난 뒤 작은 책 모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앰네스티를 떠나 구호 활동을 하는 또 다른 국제단체에서 모금 전문가로 일하는 중이라 했다. 시청 광장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모습과 달리 자주 어두워지는 표정에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직장인으로서의 삶과 조직 내 소통을 두고 고민이 깊은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말레이시아로 떠난다고 했다. 새로 구한 직장이 국제연합이 만든 아동 구호 기구인 유니세프(UNICEF)의 말레이시아 사무소라고 했다. 40대 중반을 넘기는 시점에 홀로 멀리 떠나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다니, 그 사연이 너무 궁금해졌다. 그러고보니 이 한 사람이 걸어온 길에 대해 내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당장 만나러 가겠다며 무모하게 비행기 티켓부터 알아보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온라인 영상 대화를 요청했다. 

 

드디어 약속한 그 날, 우리는 무려 4,500km 떨어진 각자의 방에 앉은 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모니터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기울이며 윤지현의 오늘을 만든 기나긴 경로를 천천히 탐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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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한 식당에서 (사진: 윤지현)

 

 

말레이시아 적응기

 

 

어떠세요, 요즘?

 

매우 정신없이 살고 있어요. 일은 괜찮은데, 여기 시스템을 잘 몰라서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같이 일하는 분이 100명이 넘어요. 거리모금팀만 70여 명이고 내부에서 전화를 받거나 행정을 하는 분들까지 구성도 다양하고요. 그중에 인터내셔널 포지션(외국인 파견 직원)은 저 하나인데, 제가 이 부서 전체를 관리해야 하거든요. 매일 너무 일이 많이 벌어져서 한국에서보다 훨씬 바빠요. 야근은 잘 안 하는데, 비공식적으로는 퇴근 후에도 메시지나 이메일로 연락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제가 일하는 곳은 유니세프 말레이시아의 위성사무소예요. 여긴 쿠알라룸푸르의 약간 럭셔리한 동네이고 주사무소는 한국 세종시 같은 도시인 푸트라자야에 있어요. 집은 중국계 말레이시안이 많이 사는 주거지역에 얻었어요. 전철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게, 대중교통 편한 데로 골랐어요. 주로 위성사무소에서 일하고, 주중 이틀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주사무실로 가요. (대중교통으로요?) 네. 기차 타고 택시 타고 그렇게요.

 

출퇴근만 해도 힘드시겠어요.

 

그렇긴 한데, 제가 대중교통 타는 걸 좋아해요. 한국에서도 한두 시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싫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특기가 출퇴근이라고, 프로 출퇴근러라고 말하곤 했어요.

 

말레이시아는 기름값이 엄청 싸요. 한국의 1/3 정도니 누구나 차를 몰고 다니죠. 차를 생산하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고 오히려 교통비가 더 많이 들기도해요. 그래도 괜한 고집이 있어서, 저 하나만을 위해서 차를 타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한국에서는 가끔 아버지가 오래 쓰신 차를 몰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혼자니까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이 모금이잖아요. 현지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대중교통 타면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보여요. 출퇴근 길에 사람 구경하면서 관찰한 걸 동료들에게 이야기해보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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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트라자야에 위치한 주사무소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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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 위성사무소 앞 풍경(사진: 윤지현)

 

 

 

장거리 이직을 결정하기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한국에서 일하셨는데, 어쩌다(?) 거기까지 가시게 된 건가요?

 

저 그냥 진짜, 그냥 지원했어요. 어디 얘기하기도 민망한데요. 사실은 이전 단체에서 일할 때 성과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했어요. 규모 있는 국제단체이고 한국 사무소는 모금이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어요. 하지만 조직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제 상사가 유난히 성과를 요구하는 사람이었어요. 살면서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나봤어요. 그런데 제가 성격이 뻔뻔하지도 못해서, 맨날 괴로워하면서도 요구하는 성과는 애써 다 채우고 그랬거든요.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죠.

 

1년 반 정도 일하고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봤어요. 비영리 구인 정보 뜨는 것마다 유심히 봤어요. 그런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저 같은 40대 후반 여성이 공채로 갈 일자리는 정말 없고, 해봐야 1년에 한두 자리 나는데 그때 운때가 맞으면 좋겠지만 안 그러면 백수로 오래 놀아야 하는 거예요. 당시에 제가 놀 형편은 아니어서 고민만 하면서 3년을 보냈어요.

 

그즈음 조직 내부에서 좀 심각한 이슈가 터졌어요. 당사자가 아니라 중간에 서 있는 입장에서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죠. 그러던 어느 날 헤드헌팅 에이전시에서 보낸 뉴스레터에서 ‘말레이시아’라는 단어를 봤어요. 유니세프라는 이름보다 먼저요.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너무 실망하지만, 진짜 되리라는 생각은 안 하고 ‘어? 한번 가볼까?’하고 지원을 한 거예요. 제가 모금 쪽 일을 계속해왔으니까 업무는 괜찮을 것 같고, 면접 보는 것만 해도 신기한 경험이겠다 싶었어요. 근데 되었고, 그래서 왔죠.

 

 

윤지현의 설명에 따르면, 국제연합이 만든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기구는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내셔널 포지션으로 채용한다. 이렇게 파견된 외국인은 기본 2년, 최장 5년까지 한 국가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그래서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일자리를 찾아 떠돌이처럼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일한다고 한다.

 

이렇게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기거나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커리어라고 생각해 일찌감치 목표를 두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윤지현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처음 그를 흔든 건 ‘말레이시아'라는 단어였고, 그 단어와 함께 떠오른 오래된 기억 속 풍경 하나가 곧 그를 움직이게 했다.

 

 

오래전에, 2003년 즈음이었어요. 그때 직장이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이 왔어요. 퇴사하고 1년 동안 여행을 했는데 그중 6개월은 동남아 지역을 떠돌았어요. ‘내가 다시 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말레이시아는 안 갔지만, 네팔,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을 쭉 다녔죠. 그러다 방콕에 있을 때였어요. 백수인 데다 술 마시고 노는 것도 잘 못해서 하루종일 공원에 앉아서 사람 구경만 하며 지내는데, 평일 저녁 시간이 되면 퇴근길에 저녁 거리를 사 들고 가는 여성들이 너무너무 부럽더라고요.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에 공원에 나와서 쉬는 모습도 부러웠어요. 거기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부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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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방람푸 파쑤멘 공원 앞 (사진: 윤지현)

 

 

언젠가 동남아에서 일할 기회가 있으면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나도 일하고 퇴근길에 밥을 사 들고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요.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요?

 

밥은 집에서 맨날 해먹고 있습니다. 안 사 먹어요. (웃음)

 


오래, 흔들리며 지나온 길

 

마음에 씨앗이 하나 떨어진다. 그 싹이 언제 날지, 물은 얼마나 주어야 할지, 언제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 알 수 없다. 아니 그보다, 그 싹이 언제 어떻게 내 마음에 떨어졌는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지현의 경우 비영리 영역에서 일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모금 전문가이자 관리자로서 현재의 커리어를 쌓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과 좌충우돌하는 경험이 필요했다. 자신은 물론 주위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 모든 일은 대체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죠. 비영리 영역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언제였어요?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글쎄요. 제가 고등학교 때 사회, 지리 같은 걸 좋아했어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학교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신문 보고 있는 학생이었던 거예요. 가톨릭 신자로 종교 생활도 열심히 해서 봉사활동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대학 진학할 때 사회복지학과나 사회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시더라고요. (왜요?) 취직해야 한다고, 회계학과를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원래 아버지 직업이 기자였는데, 중간에 사회복지 쪽으로 커리어를 전환해서 관련 기관에서 일하셨어요. 공무원과 수혜자 사이에서 일하는 게 힘이 드셨던 모양이에요.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저는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았는데, 그렇게 힘들어하신 줄은 몰랐어요.

 

그러면 반대하셨을 때 상처받았겠어요.

 

대학을 그닥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어요. 굳이 간다면 사회복지를 하겠다고 한 건데, 안 된다고 하시니까 회계학과로 갔어요. 그리고는 봉사활동을 했어요. 6년 정도 지역아동센터 교사 했고, 홈리스 식당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설거지 하고. 거의 주 3일은 봉사활동을 나갔어요.

 

계속 그런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저지를 용기가 없더라고요. 정 그러면 대학원을 가거나 다시 학교를 들어가도 되는데 엄두가 안 났어요. 그래서 졸업 후 기업으로 취직을 하고,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상태로 십여 년 동안 계약직으로 일했어요. 행정 일, 회계 하고 총무 하는 사람으로요.

 

직장생활은 한 곳에서 쭉 하신 건가요?

 

아니요. 기업에서 일하고, 종교 기관에서도 일했어요. 기업에서 재단 만드는 작업하고 나중에 거기서 일하기도 했고요. 종교 기관에서 일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크게 실망하고 그만둔 적도 있었어요. 종교 기관이라고 사람들이 다 종교적이지는 않잖아요.

 

특히 여성들은 (1990년대 후반) 직장을 다니면서 험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저도 그랬어요. 나를 소모품처럼 쓰면서 제대로 취급도 안 해주고 온갖 언어폭력, 성희롱, 성차별 같은 게 당연했어요. 그런 폭력을 가리키는 표현조차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죠. 

 

그게 너무 힘들어서 따로 종교활동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역시 용기가 없으니까 다른 걸 시도할 생각을 못 했어요. 롤모델도 없었고. ‘일하다가 시집 가’, ‘서른 전에는 결혼해야지’, ‘결혼하면 퇴사해야지’. 다들 그러니까 너무 불안한 거예요. 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제가 바라는 일의 조건은 내가 가진 기술을 쓰고, 그 과정에서 전문성이 쌓이고, 좋은 사람들과 가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걸 충족시키는 데가 없었어요. 그러다 우울증을 겪고 퇴사하고는 여행을 다닌 거예요.

 

1년 후 돌아와서 처음 가게 된 직장이 아름다운재단이었어요. 그곳은 아주 좋았어요. 회계 쪽으로 제가 가진 기술이 필요했고, 전문성이 쌓인다 싶었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하는 곳이었어요. 이전 직장에서 당연하게 겪던 인권침해나 군대식, 도제식 직장문화 속에서 느낀 모욕감 같은 게 전혀 없었어요.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자기 재산을 나누는 기부자들이 있었고, 동료들도 모두 좋았어요. 단 하나, 제가 생각지 못했던 살인적인 업무량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요.

 

어느 정도였길래 ‘살인적’이었나요?

 

제 업무의 특성이기도 했는데, 회계 업무는 컨베이어벨트처럼 그날그날 일을 쳐내지 않으면 마구 쌓이니까요. 재단다움을 강조하는 조직이라 다 같이 기부자를  만나러 다니는 기회가 많아서 좋았어요. 하지만 그걸 한번 다녀오면 다른 간사들은 다 퇴근해도 저는 남아서 마저 일해야 했어요. 시스템이 없어서 수작업도 많고, 밤새워 일하는 날도 많았어요. 마치 공장에서 일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는 어디 나가는 게 싫어지더라고요.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서로 존중하며 일하는 것, 소모되기보다는 차근차근 일을 통해 성장하는 것.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 조건을 충족하는 직장을 찾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그리고 만난 아름다운재단. 과중한 업무라는 복병에 맞닥뜨리긴 했지만, 단지 그 때문에 일할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건강 때문에 퇴사하려고 했을때도 재단의 배려로 팀을 옮겨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모금 업무를 처음 경험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왔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모두가 내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저에게 불만이 있는 동료가 있었어요. 갈등이 심해서 그분에게 제가 언어폭력을 당하기도 했는데, 저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대처를 잘 못 했어요. 조직이 너무 무방비상태라는 걸 느꼈어요. 어쨌든 좋은 의미로 모인 곳인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중재가 전혀 안 되더라고요.

 

그게 아무래도 해결이 안 되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해서 결국 그만뒀어요. 그리고는 엉뚱한 생각을 했죠. 한국에선 건강하게 살 수 없겠다, 차라리 호주로 이민가서 청소를 하든 신발을 고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요.

 

이민이라니, 그것도 호주라니! 엉뚱하다기보다는 놀랍네요.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준비를 했어요. 이민 신청을 해 놓고 준비하는 동안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 회계 담당자 모집공고가 났길래 지원했어요. 그것도 나중에 호주 가면 앰네스티에서 일했다고 한 줄 적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요. 면접을 봤고, 채용되었죠.

 

거기서 정말 많이 배우면서 일했어요. 서로 싸우기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으며 힘도 들었지만요. 특히 인권이라는 걸 접하면서 예전에 제가 직장에서 겪은 게 뭔지 인식하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그러고 보니까, 제가 새로운 걸 회피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라고요. 살면서 모험을 하고 뭔가 저지르기 시작한 게 30대 후반 와서였어요. 그전에는 용기가 없어서 아무것도 저지르지 못했는데요.


마침 그때 앰네스티에서 환경이 주어져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재밌었어요. 호주 가기 전 3년을 재밌게 일했어요.

 

진짜 호주로 가셨네요!

 

네. 활동 3년 차에 호주 이민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땐 육체노동을 하며 이민자로 살겠다는 생각은 없어졌지만, 이민 대신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영주권이 있으면 저렴한 학비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거든요. 가서 국제개발을 공부했어요.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생각한 순간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지금까지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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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공부하던 때 (사진: 윤지현)

 


그렇게 공부를 하고, 다시 앰네스티로 돌아오셨죠?

 

네. 갔다 와서 2년 더 일했어요. 그런 다음 다른 국제단체의 모금 관리자로 이직했죠.

 

앰네스티에서 일하는 동안 비영리 조직의 규모와 의사결정에 관해 많이 고민했어요. 국제 조직인 데다 회원이 많고 모금을 열심히 하는 곳인데요, 강한 활동성을 가지고 평화운동이나 당사자 운동을 하다가 들어온 분들이나 풀뿌리성을 주장하는 분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모두 포용하고 가면 좋겠지만, 맨날 앉아서 논의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일이 안 돌아가니까.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그다음 단체로 이직할 때는 조직 체계에 맞게, 사명을 위해 일한다는 지향을 가지면서도 일도 프로패셔널하게 하고 급여도 프로패셔널하게 받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사 때문에 마음고생했던 그 곳이군요. 그다음이 바로 지금 일하시는 유니세프고요. 의도하신 건 아니겠지만, 실제로 점점 더 크고 전문성을 중시하는 조직으로 이동해오신 것 같아요.

 

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러네요. 

 


사회적 가치 실현과 직업인으로서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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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0일의 윤지현 (사진: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을 축하하는 시민의 모임)

 

 

제가 늘 하는 질문인데요, 지현 님은 자신이 활동가라고 생각하시나요?

 

앰네스티에서는 활동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 ‘조직’이라는 부분, 특히 국제 조직에서 요구하는 것을 해내야 하는 부분에서는 활동가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좀 고민스러워요. 이런 조직들은 지향하는 사명이 있다 해도 전체적으로 운영하는 논리는 산업에 가까워요. 풀뿌리조직이 아닌 이상, 비영리여도 조직 관리나 인사 평가 같은 건 전문성을 갖고 해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솔직히 활동가의 정의를 잘 모르겠어요. 가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소위 말하는 ‘현장’에 있어야만 활동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에요. 활동가라는 걸 직업으로 평생 하면서도 거기서 어떤 활동성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요. 

 

제가 어떠한 일의 가치를 위해, 그 일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해온 건 맞는 것 같아요. 그걸 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요. 하지만 ‘이게 실제로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인가?’ 의문을 품고 일한 적도 많아요. 특히 모금할 때는 직업인이라고 느껴요.

 

이를테면 오늘 우리가 어떤 사진을 쓸지 의논하는 회의를 했는데요, 자극적이고 비윤리적인 사진이 실제로는 모금이 잘 돼요. 그런 걸 다 배제하고 고르면 또 너무 딱딱하고 성과도 안 나죠. 그럴 때 중간 정도에서 선택을 하게 돼요. 저는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 데는 이 일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도 있을거라고 봐서, 성과가 안 나면 그게 또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윤리의 층위가 복합적인 거네요. 사진이 갖는 사회적 가치라는 윤리,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윤리. 선택의 문제가 되겠어요.

 

맞아요. 특히 한국에서 거리모금을 하는 곳들은 그 윤리적인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거리모금 하는 업체는 대부분 성과급 기반으로 운영해요. 그러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시장이고. 그 안에 있는 한, 실무자는 그 방법으로는 모금하지 않겠다는 결정 권한이 없어요. 그렇다면 성과도 나면서 그나마 좀 나은 게 뭐냐는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대안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들어요. 그 사이에 밖에서는 여전히 나쁜 선택을 하는 걸로 보이겠죠.

 

이야기가 나왔으니 모금 업무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볼까요? 그 일은 잘 맞으세요?

 

말씀드렸듯 아름다운재단에서 과로로 건강이 나빠졌을 때 회계에서 모금으로 팀을 바꾼 게 쭉, 지금까지 커리어를 이어오는 계기가 되었어요.

모금에도 여러 영역이 있고, 모금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술도 여러 가지예요. 저는 그중에서 치명적으로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모금을 하려면 시스템을 만들어놓기 전이라도 일단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말도 잘하고, 성과가 보이면 달려드는 성향이 필요해요. 모금활동가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고, 실제로 모금도 잘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런 성향이 없어요. 십 년 동안 회계 업무를 했으니까, 누가 1, 2%라도 안 맞다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죄책감에 시달려요. 그래서 바로 이전 직장에서는 모금이 안 맞는다는 생각을 3년 내내 했어요. 매년 주어진 성과를 100% 이상 달성하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성과는 초과달성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성과와 내 성향은 큰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게 다른 거예요. 모금가가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지 못했지만, 회계 업무를 했기 때문에 위험을 잘 발견하고 해결 방안 세우기를 좋아해요. 계속 앉아서 토론만 하는 건 싫고, 문제를 발견하면 분석하고 기획해서 빨리 해결하고, 다음 솔루션 논의하고, 스탭 원 투 쓰리 밟고 타임라인 짜고 그러는, 문제해결 중심적인 사람이더라고요. 근데 그게 모금에서도 유용한 기술이에요. 어디나 문제점은 있고, 그걸 발견해서 개선할 필요가 있잖아요.

 

이제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던 부분도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전 직장에서는 상사가 너무 저를 쥐어짜니까 괴로운 게 당연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여기 와서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어차피 나를 뽑은 건 조직이고, 최선을 다해도 안되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니 일 자체도 좀 더 즐거워졌어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모금하는 사람들이 재밌거든요. 유쾌해요. 물론 분석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이고 수용적이에요. 싸움을 잘 안 해요. 아이디어가 좋다 하면 받아들이고, 내가 맞다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들이 잘 없어요. 그게 저를 편하게 해 줘요.

 

관리자로서는 어떠세요? 백 명이 넘는 분들을 총괄하시잖아요. 조직 체계는 좀 잡혀 있나요?

 

국제연합 국가사무소의 조직체계는 모금에 맞는 시스템이 아니에요. 모든 체계는 프로그램을 위해 설계되어 있고, 모금은 특정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도입한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는 어쨌든 규칙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일하기 위해 협의하고 평가도 해야 해요.

 

지금 제가 일하는 방식은, 절대 자잘한 터치를 하지 않고 일단 그 사람을 믿고 맡겨요. 그래서 결과를 가져오면 뭘 개선하면 좋을지, 어떻게 하면 본인에게도 좋을지 생각해서 피드백을 해줘요. 때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는 되도록 그 사람 입장에 공감해주려고 해요. 진행 상황을 중간중간 미리 체크하고, 정 안 되는 부분은 조정하거나 대안을 찾고. 그게 제 역할이에요.

 

굉장히 이상적으로 들리는데요, 실제로는 매 순간 섬세한 판단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 노하우야말로 이전에 오래 고민하고 갈등하던 경험에서 나오는 거겠죠?

 

그렇죠. 5년 동안 앰네스티에서 일하면서 별별 인사 관련 사건을 다 겪었어요. 그때는 누가 늦게 오는지로 부들부들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있으면 너무 밉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솔직히 10% 정도는 ‘아, 정말 무책임하네’ 생각하면서도 90%는 ‘그럴 수 있지 뭐. 나도 그랬을 수도 있어. 저 사람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라는 생각이 이제 드는 거예요.

 

사실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짠 이루어지는 일은 없어요. 당장 구호 현장에서 뛰어야 한다거나 세무신고를 제때 안 해서 페널티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계획에 조금 변동이 생겨도 큰 영향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순위를 정해주고, 애써 해내는 사람은 번아웃되지 않도록 다른 직원들과 업무를 조정해서 쉴 수 있게 해 줘요. 제가 일을 떠맡지는 않으면서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게, 특히 저는 외국인이라 잘못하면 쉬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봐요. 쉬워도 나를 좋아할 수는 있잖아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일도 더 쉬워지고, 뭔가 되는 게 훨씬 많더라고요. 특히 비영리 영역에서는요. 상대의 마음을 얻으면 제가 기대한 것보다 백 퍼센트 이상을 해내기도 하고요.

 

저 참 딱딱한 사람이었는데, 이건 다 경험으로 알게 된 것 같아요.

 

경험이 쌓인다고 꼭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음, 그게 참. 너무 힘들어서 변할 수밖에 없었어요. 활동가분들은 모를 거예요. 본인들이 얼마나 관리 대상으로서 힘든지. (웃음)

 

힘을 좀 빼긴 하되 넋 놓고 다 빼면 안 되고, 사람들 안에 들어가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살살 이끌어야 해요. 그러면 또 강하게 안 한다고 불만인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잘 봐야죠

 

 

적당한 거리에서 느끼는 재미와 즐거움

 

오랜 시간 사회운동, 넓게는 비영리 영역에서 활동해온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올리기 쉬운 모습이 있다.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든지, 젊을 때 품은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우직하게 뚜벅뚜벅 걸어왔다든지 하는. 하지만 그동안 내가 만나본 활동가 중에서 그런 틀에 맞춰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윤지현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마음에 품은 사회적 가치를 따라가면서도 직업인으로 책임을 지고 쳐내야 할 일이 끊이지 않는 일상을 산다. 어느 일터나 그렇듯 일 자체로 힘든 면이 분명히 있고, 외국인으로서 낯선 문화와 기후에 적응하느라 몸도 고되다. 그런데도 윤지현은 대화 중에 ‘즐겁다’, ‘재미있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반복했는데, 그걸 듣는 게 정말 기뻤다. 그래, 그거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해?

 

 

매일 사건사고로 바쁘다고 하시지만, 듣고 보니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게 일하고 계신 것 같아요.

 

딱 적당한 거리감으로 일하고 있어서 좋아요. 한번은 아주 경력이 긴 현지 직원이랑 출장 가서 방을 같이 썼는데, 자기 삶의 이야기를 되게 쉽게 하고 저한테도 자연스럽게 물어보시더라고요. 한국에서 마지막 일했던 곳에서는 제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없고, 누가 물어본 적도 없었거든요. 앰네스티에서는 지나치게 사적으로 밀접한 게 문제였다면 거기서는 세대 간 단절에 가까운 모습을 보아서,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워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재밌는 게, 앉아서 두시간씩 얘기해요. 가끔 완전 답답할 때도 있어요. 한국이면 삼십 분 얘기하면 헤어지는데 무슨 얘기를, 그것도 업체랑 앉아서 두시간을 해요. 디자인하면 디자인 업체랑 그러고. 근데 또 결과는 없어요. 얘기는 많이 해도.

 

그러다가 금요일에는 갑자기 사무실에서 가라오케 틀어놓고 노래를 해요. 그런 게 저는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노래하지 않아도 즐겁고 새로운 아이디어 얘기하는 것도 즐거워요.

 

정말 눈물 나도록 고마운 건, 이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같이 가자고 해요. 나는 외국인이고 직위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저를 끼워주는 거예요. 그러다가도 제가 미팅이라도 하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놔두고 가버려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점심 같이 먹을 사람 있냐고 방마다 물어보러 다녀서 누가 있으면 같이 가요. 생일 맞은 사람이 있으면 같이 돈 내서 맛있는 것 먹고 놀다가 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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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동료들 (사진: 윤지현)

 

 

지금의 저를 보고 그저 “운이 좋았구나"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저 이루어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가끔 느껴요. 내가 지금까지 일했던 시간이 쌓여서 여기서 일하게 되었구나, 내 마음속에 지향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데로 튀지 않고 비슷한 영역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호주에서 유학하던 때에, 그 생각 많이 했어요. ‘내가 어쩌다가 여기 왔을까? 회계학을 전공했는데 왜 여기서 국제개발을 공부하고 있지? 흔히 국제 커리어를 쌓고 싶은 젊은이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런데 사실 거길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로부터 십 년쯤 전에 [오래된 미래] 를 읽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동안 해온 일과 관련성도 있지만, 회계나 마케팅, 홍보가 아니라 굳이 국제 개발을 선택한 건 분명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계속, 책 속에 나온 시각을 가지고 일을 해올 수 있었어요.

 

 

그저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질문을 던지는 입장이지만, 활동가의 정의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활동가로 살겠다 선언한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니까. 어쩌다 마음에 떨어진 씨앗 한두 개가 어느 틈에 싹을 틔웠다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때론 꺾이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라난다. 그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윤지현이 말했듯, 그저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모든 일의 바탕이 되는 자기 자신, 자기 몸과 내면의 건강을 돌보며 꾸준히 일상을 살아내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가치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입체적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다양한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줄 새싹을 틔우려 계속 시도하는 것. 그게 최선이 아닐까?

 

아주 천천히, 그러나 치열하게, 시간을 쌓으며 자기를 발견해온 사람. 윤지현의 일상이 그렇게 내내 건강하기를 바라며.

 

 

“라다크에서 나는 이른바 진보라는 것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와 분리되고 이웃들과 분리되고 결국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 서구의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오래도록 유지해온 평온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도시와 지방, 남성과 여성 그리고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복원해야 한다. 라다크의 사례처럼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해주는 상호연계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향후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라다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폭넓은 시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치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2007,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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