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나누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 박운정


인터뷰 취지[활동가인터뷰]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활동가이야기주간] 전까지 꾸준히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활동가이야기주간]은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활동을 통한 변화 사례를 공유하기 위한 전국적인 대화 모임 주간으로 2019년 11월 4일(월)~8일(금)까지 5일간 전국 곳곳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인터뷰 날짜
글쓴이신비. 시민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다 2012년부터 [어쩌면사무소]라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해왔습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2018, 슬로비), <사람, 마을, 세계를 잇다>(2019, 아모르문디)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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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정 (사진: 신비)

 

만나면 늘 표정이 밝다. 사회생활을 하느라 몸에 밴 제스쳐도 아니고 지나치게 사적으로 파고드는 친밀감도 아닌, 딱 적당한 거리감으로 주변을 자연스레 데우는 사람. 박운정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세월호 가족을 위한 목도리 뜨기 모임이었던 듯하다. 그다음 떠오르는 건 술빚는 모임에서 직접 담갔다며 꺼내 보이던 예쁜 술 한 병, 그리고 어느 날 히말라야 트래킹을 간다며 소셜미디어에 올린 커다란 배낭 사진 같은 것들이다. 말하자면, 일상 속에서 배우고 즐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크다.

 

다른 한편으로 박운정은 오랜 시간 풀뿌리 주민운동 분야에서 일해온 사회운동가다. 서울 강북구의 풀뿌리 단체인 열린사회시민연합 북부시민회(이하 시민회)에서 회원으로 시작해 상근활동가, 사무국장, 대표를 거치며 이십년이 넘도록 활동해왔고, 지금은 민주주의 기술학교와 함께 사람과 지역, 조직 사이의 대화와 협업을 촉진하는 퍼실리테이터로 활약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서로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그 ‘다른 한편'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닌데, 만나면 주고받을 더 즐거운 이야기가 많아서 그랬던 걸까? 마치 달의 뒷면처럼 가려져있던 그 세계에 관해 자세히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 처음 가본 서울 미아동 책읽는마을 북카페는 조용하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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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미아동 <책읽는마을> 북카페 전경. (사진: 박운정)

 

건물 주변에 학생들이 종종 보이네요.

 

여기가 구립 청소년도서관이거든요. 1층에 있는 이 북카페를 시민회에서 운영하고요. 단체에서 예전에 마을도서관 운동을 활발히 했었는데 공공도서관이 많이 생기면서 필요가 줄어들었죠. 그래서 도서관 활동을 공동육아로 전환했다가 또 한참 지나서 북카페로 활동을 이어왔어요. 지금 운영은 거의 주민들이 직접 하고 있어요. 카페를 지키는 분도 그렇고, 여기 있는 쿠키는 그분 딸이 만든 거예요.

 

설명을 듣고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하며 당연히 쿠키도 챙겼다. 그리고 돌아서니 카페 한쪽 벽에 가득 진열된 잡화가 눈에 들어왔다. 비누, 향초, 인형 등 지역 주민들이 만든 물건을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한다고 했다. 지역단체와 주민, 공공기관이 협업해 지역에서 공간을 만들고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런 모델이 동네에 등장하기까지, 시민회 활동만 어림잡아도 이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을 함께한 박운정과 시민회의 첫 만남이 궁금해졌다.

 

 

조금은 엉뚱한, 시민회와의 첫 만남

 

처음에 어떻게 시민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회사 다니다가 길에 붙은 현수막이랑 포스터를 봤어요. 풍물패 모집. 고등학교 때 풍물 쳤거든요. (고등학교 때요?) 네, 고2 때. 잠깐 쳤어요. 학교 축제에서 풍물을 치려고 했는데, 우리 같은 학생이 뭘 알았겠어요? 악기도 없고 강사도 없고. 알음알음해서 대학로에 갔어요. 학교가 혜화랑 가까웠거든요. 그 당시 주말이면 대학로에서 풍물을 치는 사람들이 늘 있었어요. 거길 찾아가서 ‘근처 학교 학생들인데 이거 좀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반가워하면서 잘해주더라고요. 한 달 반? 두 달 가까이 배웠어요. 잠깐 접했는데 재밌더라고요. 그리고는 제가 다니던 학교가 상업고등학교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고, 회사 다닌 지 1년이 채 안 된 차에 그 포스터를 본 거예요.

 

그럼 그냥 풍물 때문에 무작정 찾아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그때 단체 이름이 겨레사랑주민운동본부였어요. 처음 보고 ‘아, 올드한데?’ 싶었죠. 일단 가서 풍물만 배우고 나와야지 했는데... 풍물이 워낙 재밌었어요. 강습 기간은 원래 3개월이었데 그걸로는 성이 안 차니까 한 6개월 치고 공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좀 잘 치게 되었고, 그게 사람들 눈에 띄었나 봐요. 단체에서 저를 눈여겨보고 있었더라고요.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있었던 건가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지는 않았어요. 자라면서 알게 모르게 본 것도 있었고. 고등학교 때 풍물 배우던 때도 알려주던 대학생들이 막 학습을 시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지만, 워낙 엄혹한 시절이라 가보면 늘상 데모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회사 생활이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성차별 문제도 있었고. 그런데 단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매력적이었어요. 평소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삶의 균형이랄까? 사회 문제나 정치 같은, 내 주변 사람들은 나누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니까 그게 흥미로웠던 거예요.

 

시민회에는 대학에서 학생운동 하다가 지역으로 온 분들도 있고, 저처럼 꼭 운동권 계보가 있지는 않아도 사회에 관심 있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반반 섞여 있으니까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이야기도 하고 페미니즘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직장에서 느꼈던 문제들이 여기 오면 설명이 되고 그러니 같이 책도 읽고, 술도 마시고 그러면서 조금씩, 주저앉아서 자꾸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앞서 단체에서 본인을 눈여겨보았다고 하신 건 어떤 지점이었을까요?

 

시민회는 87 (민주화운동 운동가들이) 이후 지역에서 활동하겠다고 만든 단체였어요. 자기들은 학생운동 출신에다 목적을 가지고 지역에 들어와서 활동하는데 정말 그냥, 시민의 한 사람인 제가 찾아와 풍물 치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성을 배우고, 학습하고 활동하고 그러니까 너무나 이상적이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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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패 활동 (사진: 박운정)

 

 

2년 정도 지났을 때 그분들이 풍물 강습을 시켜서 강사가 되었어요. 처음부터 돈을 받고 하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보조강사로 들어갔다가 메인 강사가 되었고, 강습 부장, 풍물패 패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천천히 밟아나가다가 나중에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상근자를 한다고 하니까 선배들이 너무 좋아했죠.

 

거기까지 얼마나 걸린 거예요?

 

한 십 년 정도?

 

꽤 긴 시간이었네요.

 

네. 사실 신념 때문에 당장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그런 개념이 아니었어요. 나한테는 생업이고, 심지어는 가장 노릇 비슷하게 했으니까. 십 년쯤 돈을 벌고 나니 집안의 경제적 부담이 좀 덜어졌어요. 회사에서도 딱히 다음이 기대되지 않고, 그러던 차에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거였어요.

 

 

박운정이 말한 대로,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운동가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운동권 계보가 없는 사람'들을 발굴하러 나섰다. 시민운동에서 말하는 ‘평범한 시민의 참여'도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주민운동은 마을, 육아, 교육, 문화예술 등 생활과 밀착한 의제에 집중한 만큼, 기존 사회운동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접하고 뿌리내리기 좋은 토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삼십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현장을 지켜온 사람 중에는 어떤 식으로든 ‘운동권 계보가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온 건지는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계보가 없는' 박운정이 어떻게 그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장녀 콤플렉스와 첫 번째 사회생활 10년

 

좀 더 사적인 부분인데요, 일찌감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장녀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중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엄마가 아직 젊으신데 자식 셋을 키워야 했으니까 생계에 대한 부담이 컸죠. 그래서 상고에 갔어요. 대학 안 가고 직장생활 하면서 돈 벌려고. 

 

가고 싶은데 참은 거예요? 아니면 빨리 사회인이 되겠다는 마음이었을까요?

 

대학은 가고 싶었죠, 당연히. 풍물 배우러 대학로 드나들면서 본 것도 있고. 그래도 가정 형편이 안 되니까.

 

그러면 ‘왜 나는 못 가지?’ 하고 상처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빨리 철이 들었던 걸까요?

 

장녀 콤플렉스라는게 주로 그렇죠. 그땐 몰랐는데, 제가 알게모르게 엄마에게 남편 노릇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우리 엄마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엄마도 저한테 집안의 대소사를 다 의논하셨어요. 그래서 책임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이미, 집안 형편이 안된다는 걸 알고 상고에 가기로 결심했죠. 빨리 돈 벌어서 엄마를 도와드려야지 했어요. 

 

그래도 대학 욕심이 있고, 공부를 못했던 것도 아니어서 나중에 회사 다니면서 방송대 들어갔어요. 회사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어서. (무슨 공부 하셨어요?) 방송정보학과에서 시민방송, 매스 커뮤니케이션 그런 거 배웠어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 재밌었어요.

 

대학 진학하는 데는 회사에 느낀 학력 차별도 영향을 주었어요. 일단 기본급 차이가 나고, 그게 연차 쌓일수록 더 벌어지고, 남자가 먼저 승진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그랬어요. 진짜 일은 정말 못해도 대졸이면, 그보다 더 오래 근무했고 업무기여도도 높은 저에 비해 급여가 높았어요. 거기다 남녀차별까지. 제가 7년 차 때 들어온 신입 남자 인턴은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왔다고 급여가 저랑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도 회사 들어가서는 집안의 경제 상황이 많이 나아졌어요?

 

어쨌든, 안정적이었죠, 엄마도 생활력이 강하셨지만 큰딸이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드리니까. 그리고 동생들도 대학을 안 갔어요. 어쩐지 둘 다 공부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혹시 동생들도 본인처럼 집안 사정을 생각한 건 아닐까요?

 

여동생은 살짝 그런 느낌이 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취직하고 결혼도 빨리했고. 아이 둘 낳으면서 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좀 커서 다시 일하고 있죠, 남동생은 정말 공부에 뜻이 없었어요. 대학 보내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잘 안 되었어요.

 

아무튼 그때쯤 되어서 집안 사정이 좀 나아졌어요. (서운한 마음은 없었나요?) 어릴 때는 그런 마음이 약간은 있었지만, 저는 하고 싶은 공부도 나중에 직접 찾아서 했고 그 외 다른 원하는 것도 다 하고 살아와서 이제는 그런 마음 없어요.

 

그런 얘길 가족들이랑 해봤어요?

 

안 했죠. 그때는 그 감정이 어떤 건지도 잘 몰랐고,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내가 장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삼십 대쯤 되어서 동네 엄마들과 심리학 공부하고 집단상담하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도 요즘 여동생하고는 조금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동생이 한참 육아할 때는 못하고 살다가 어느 정도 애들 키우고 나니까 소소하게 이야기 나누게 되었어요. 엄마 노후에 관해서 얘기하다가 “너 예전에 어땠어? 결혼할 때는?” 그렇게 슬금슬금.

 

엄마랑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아무래도 미안해하시니까. 저는 엄마가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얘기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일찍 철든 게 맞겠죠. 엄마는 가끔 술 드시면 미안하단 얘기 슬쩍 하시는 정도예요. 제가 대학 공부한다고 할 때도,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일 계속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송대로 가기로 했을 때, 큰돈 안드는데도 등록금 내라며 돈을 주셨어요.

 

회사에, 단체 활동에, 심지어 대학까지 다니던 때는 정말 바빴겠어요.

 

바빴어요. 에너지가 좋았을 때니까. 풍물패 일이 뭐라고, 회사 다니면서도 일주일에 너댓 번은 나간 거 같아요. 강습 때는 강습하러 가고, 운영위원회 있으면 회의하러 가고, 또 풍물패 모임 가고, 하루쯤은 술 먹자 해서 가고, 그런 식으로. 여름휴가 껴서 풍물 전수도 다녀오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한 곳에 올인해서 산 건 아니었어요. 방송대 다닐 때는 스터디모임 했고,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도 꾸준히 했으니까. 그렇게 회사 다니며 일하고, 단체 활동하면서 사회화 과정을 경험하고, 뭐 배우고 싶거나 하면 몇 달씩 배우기도 하고, 같이 배우던 사람들 인연이 되면 계속 만나거나 하고. 이것저것 후회 없이 많은 걸 했어요.

 

그리고 십 년 후에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거네요.

 

네. 일단 경제적 책임에서 좀 자유로워졌고, 회사에서 더 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임금차별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나요?

 

있었죠. 제조업체인 데다 가족회사여서 내부에서 줄서기도 심했고, 경영자들이 일하는 사람 생각 안 하고 다 자기네 것인 양 싸우고 그런 것도 참 싫었어요.

 

롤모델도 없었어요. 그때까지 여성 직원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간 사람은 영업이사였는데, 그분은 미혼에다 성질이 아주 대단했어요. 영업이 되게 빡센 곳이거든요. 막 욕설하면서, 명예 남성으로 사는 분이었죠. 저는 다른 부서였지만 그 모습이 참 보기 안 좋았어요. 더 있어 봐야 저 꼴일까? 희망이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다른 회사 간다고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던 차에 활동가로 일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그런 제안은 그때 처음 받은 건가요?

 

그전에도 물론, 얘기는 몇번 있었죠. (제안받고) 고민을 좀 했어요. 그보다 일단 쉬어야겠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1년 정도는 나에게 주는 선물로 생각하고 쉬었어요.

 

쉬면서 주로 어떤 걸 고민했어요? 경제적 책임이 덜어졌다고는 해도, 단체에서 일하면 급여가 반 토막은 날 상황이었을 텐데요.

 

반이 아니라 삼분의 일 토막이 났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저축이 있었고, 제가 소비 성향이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괜찮을 것 같았어요. 생활력이랄까? ‘돈이 필요하면 뭐든 돈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겠지. 어떻게든, 엄마랑 내 입에 풀칠은 하고 살지 않겠어?’ 그런 자신감이 살짝 있었던 거 같아요. 그보다 더 고민은 ‘내가 진짜 비영리에서 활동할만한가?’였죠. 십 년 경험했다 해도 회원으로 활동한 거랑 아예 상근활동가가 되는 거랑은 다를 테니까.

 

그래서 다른 단체 면접도 가 보고, 프로젝트로 (시민회 일에) 결합하거나 자원봉사도 해보면서 6개월을 보냈어요. 그 뒤에 결정했죠. 시민회에서 일하기로. 그리고 나머지 3개월은 인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게 제가 혼자 가 보는 첫 해외여행이자 배낭여행이었어요.

 

쉬는 동안 생계나 여행 경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만두기 전에 미리 돈을 마련했어요. 집에 드리는 생활비도 미리 말씀드려서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큰 부담은 없었어요. 대신 쉬는 동안은 돈 버는 일은 거의 안 했어요. 그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쓰려고.

 

그래도 예전에 회사 다니면서 비축해두었던 건 쓰지 않고 그대로 지켜왔어요. 지금까지도 계속 갖고 있죠. 그렇게 최소한 갖고 있어야 할 목돈은 유지해두고, 평소 소비를 많이 하지 않으니까 조금씩 모은 돈이랑 퇴직금 정도를 생활비와 여행 경비로 썼어요.

 

 

쉼과 여행, 나에게 주는 선물

 

첫 회사를 만 9년 다니고 1년 쉬었다. 나중에는 시민회에서도 만 9년을 채워 일하고 또 1년 쉬었다. 일부러 맞추려 해도 어려울 정도로, 박운정은 딱 십 년 주기로 1년씩 자기에게 쉼을 선물하며 지내왔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안식년에는 인도로, 남미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 그 선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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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 (사진: 박운정)

 

이직 못지 않게 장기 해외여행도 만만찮은 일일 것 같은데요, 어땠어요? 잘 맞으셨나 봐요?

 

네.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처음 배낭 여행할 때 말도 안 통하지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지, 그러다 보니 아주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 먹고, 자고, 이동하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미 알던 나의 민낯을 보면서 자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경험이 좋았어요. 그래서 저는 여행이 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엉뚱한 곳에 나를 놓아보는 것. 그러면 그곳에서 만나는 나를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되거든요. 물론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이런 저를 도와주기에 가능한 일이죠.

 

인도, 남미, 네팔… 대체로 휴양지보다는 액티비티가 주된 여행을 즐기시는 것 같아요. 지리산 종주 같은 산행도 좋아하시고. 특별히 이유가 있으세요?

 

몸 움직이는 것, 특히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해요. 늘 복잡한 도시에 살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을 동경하게 되는 것 같아요. 대자연과 마주하다 보면 그동안 아등바등하던 일들에도 초연해지고, 우주의 일원으로서 조화로움과 자유로움도 느껴요. 그 덕에 겁 없이 도전했던 액티비티들도 있었죠. 즐거운 추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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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 여행 (사진: 박운정)

 

 

전업 활동가로 보낸 두 번째 십 년

 

다시 조금 앞으로 돌아가 보죠. 회사 그만두고 1년 쉰 다음 시민회 일을 시작하셨는데, 막상 해보니까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녹록지는 않더라고요. 확실히, 회원 활동할 때 보던 입장이나 역할, 시선이 상근자가 되고 나니 다르게 보이는 면이 있었어요. 제가 상근하기로 했을 때 좋아한 선배들도 있었지만 걱정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일반 회사에서 시스템 갖춰진 일을 하다가, 가치 중심적인 데다 시스템이랄 것도 없는 곳에 와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한 거죠.

 

실제로 초반에 힘들었어요. 근무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고. ‘왜 아침에 제시간에 출근을 안 하지?’, ‘왜 뭐든 한 일에 대한 기록이 없지?’ 저는 워낙 그런 게 몸에 밴 터라... 게다가 회원으로서 자발성을 갖고 참여하던 것과 다르게 상근자가 되니까 뭔가 조직해야 하고, 천차만별인 회원과 일반 주민들을 만나서 일해야 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내 마음 같지 않고, 내 마음을 다 표현하는 것이 좋지도 않고, 성질 죽여야 하고, 그런 것들이. 그래도 회사에서 하던 일과 다른 보람과 가치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는 각자 역할이 있고 책임소재도 정해져 있으니까, 잘 될지 안 될지 전전긍긍하지 않고 내가 할 일만 잘하면 되었어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A부터 Z까지 (다 해야 해서) 성취감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걸 느끼는 거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협동하고 연대해야 하는지 배웠고, 그걸 통해서 얻는 성과가 더 크고 기뻤어요.

 

어떤 면에서는 업무강도가 더 높아졌을 것 같네요. 회사 다니면서 단체 활동하는 건 서로 다른 세계니까 삶이 이완되는 면이 있었다면, 이제는 아주 올인한 상태가 된 거잖아요.

 

맞아요. 업무강도도 높았지요. 제가 2002년에 상근활동을 시작했는데, 좀 새로운 분위기가 있었어요. 사회적으로는 제도적 민주화에서 일상의 민주화 쪽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지방자치가 부각되는 시기였어요. 단체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1998년도에 지역 운동을 하던 2개 단체가 통합하면서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지부로서 북부시민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양한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지역 활동에 비중을 두고 사업을 펼치던 때였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진 건가요?

 

예전에는 단체회원 중심의 활동이나 사회정치적인 면에 주력했지요. 그러다 통합 후 새롭게 기치를 내건 것은 크게 세 가지였어요. 시민교육, 주민자치, 자원봉사. 이 세 영역에서 시민들과 만나며 지역 안에서 운동을 하자고 했죠. 자원봉사는 지역 내에서 이웃끼리 서로 돌보는 활동을 주로 했어요. 주민자치 영역에서는 본부에서 2001년부터 개최한 주민자치박람회가 큰 사업이었어요. 제가 회사 그만두고 프로젝트로 참여했던 게 바로 그 행사였죠. 전국적으로 사례 모집해서 좋은 사례를 공유하고 시상도 하고 그런 행사예요. 지금까지 이어져 올해는 수원에서 진행하더군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주민자치 영역이 한계가 있었던 게, 여성이, 그것도 젊은 미혼여성이 주민자치위원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활발히 참여하지 못하고 측면 지원만 해야 했죠.

 

그리고 시민교육. 제게 제일 잘 맞았고 보람을 느낀 일이었어요. 이전에 도서관 운동에서 공동육아, 북카페로 이어온 흐름이 있었는데, 그걸 같이 하던 엄마들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역 어린이학교 또랑이라는 활동을 시작해서 십년동안 계속 했어요.

 

시민교육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어요?

 

마을 교육을 함께 하는 것, 그리고 지역 문제를 아이들 눈높이에서 직접 찾아보고 실천하도록 돕는 게 좋았어요. 사회 교과목으로 학습 교재도 만들었어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학습해서 만들어 쓰고 학교에도 전파했죠. 그 일로 지역 사회의 여러 기관과 만나고 쭉 연결해나가면서 네트워크를 꾸리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어요. 주체로서, 욕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함께 움직이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크게 얻었어요. 그런게 힘이 돼서 열심히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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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서 보람을 느낀 건 특히 두 가지 방향에서였어요. 아이들은 활동을 통해 사회화하고, 고학년이 되면 진로 교육까지 이어받을 수 있었어요. 단지 직업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동시에 엄마들은 그림책도 함께 읽고 그러면서 자기 치유를 했어요. 아이 교육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성장도 놓치지 않는다는 게 참 좋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평생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저희가 애초에 민주시민교육 방법론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하고 보니까 다양한 연령대와 만나는데 이걸 엮어낼 방법이 도저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평생학습을 공부하러 대학원에 갔어요.

 

이번에도 방송대였나요?

 

네. 그즈음 방송대에 평생교육학과가 생겨서 2년 차에 들어갔어요. 가서 놀란 게, 50명 정원에 48명이 교사더라고요. 나머지 두 명 중 한 사람이 저고, 또 한 사람은 도서관 운동 하던 분이었어요. 저는 학위보다는 공부 자체가 필요했던 거라 활동과 병행하면서 도중에 휴학하고 그렇게 몇 년 걸려서 졸업했어요.

 

그렇게 또 십 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고민이야 없었으랴 마는 대체로 즐겁게, 열심히 활동했다. 이른바 ‘평범한 주민'에서 지역과 조직을 아우르는 활동가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으면서 인간적으로도 성장했다. 흔히 경력단절을 불러오는 요인으로 지목하는 결혼이나 출산, 양육 같은 문제를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비결은 따로 없다. 애초에 그 길을 가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별로 생각은 없어요? 주위에서도 권하지 않고요?

 

주변에서 압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다지 크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결혼은 인연이 돼서 하면 하겠다는 마음이에요. 비혼으로 살겠다거나 반드시 결혼하겠다거나 그런 마음도 없어요.

 

어떤 이유가 있어서 거부한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선택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 뿐이라는 거네요?

 

네. 다만 아기는 낳고 싶지 않아요. 한 사십 대 들어서면서 그 생각 했어요. 조카들이 크는 걸 보며 대신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지역에서 초등, 청소년 친구들 쭉 만나면서 사회적 부모로서 역할도 해봤으니까. 그런 마음이면 되고 그런 역할 했으면 됐지,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마흔 넘으니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걸 느끼면서 아예 마음이 사라졌어요.

 

십 년 활동한 후 시민회 일을 그만두셨는데요, 그렇게 즐겁게 활동하던 단체를 그만둔 데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제일 큰 걸 들자면 재미가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하고 싶은 게 없어졌어요. 이전에는 뭘 하면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지?’, ‘이번에는 이렇게 해봐야지.’ 뭐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그 즈음에는 더 해보고 싶은 게 없다고 느꼈어요. 그만큼 일을 많이 하기도 했죠. 사무국장이 되고는 재정을 책임지는 것도 어려웠고, 번아웃 증상도 있었어요.

 

한 곳에 너무 오래 일하다보니까 고여있는 느낌. 단체도 나도 더 이상 변화나 성장이 없고. 그래서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기다 좀 굵직한 일에서 동료와 시각 차이를 겪으면서 이렇게 더 해봐야 서로에게 안 좋겠다 싶어서 정리하기로 결정한 거죠. 근데, 마음먹고도 한 일 년은 더 일했어요. 다 정돈을 해놓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책임감이 컸달까.

 

쭉 활동하시던 기간에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고, 어떤 면에서는 기존 운동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꼭 활동을 지속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온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있겠죠. 그래도 여전히 지역에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그게 안 보인 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거였죠. 다른 방식의 운동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번아웃을 겪으면서, 내가 해보고 싶은 게 없어진 것이 너무 무서웠어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행복을 고민할 때, 이대로 계속 있어서는 앞으로의 그림이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그렇다 해도 시민성, 시민교육, 이런 키워드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었어요. 시민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 필요해서 같이 학습하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그런 과정과 내용이 저한테는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제 그 한 가지에만 좀 집중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어요.

 

비슷한 경력을 가진 활동가들이 정치나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많죠. 그런데 저는 그게 꼭 좋아 보이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냥 내가 한 개인, 시민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같이할 동료를 많이 만나보는 것. 이게 저에게는 더 매력적이고, 하고 싶은 일에 더 가까웠던 거 같아요.

 

그래서 1인활동가가 되었군요.

 

네. 단체를 그만두어서 소속이 없어졌지만 지난 활동의 백그라운드가 있으니 접점은 있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래도 막상 그 상황이 되니까 두렵긴 하더라고요. 혼자서 사회활동을 한다는 게 뭘까? 무엇을, 누구랑 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 할 때 먼저 한 선배가 손 내밀어줘서 같이 일해보기도 했어요. 같은 단체에 있다가 저보다 먼저 그만두고 혼자 활동하던 분이었어요. 그 기간에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서로 다른 점도 느끼고 해서 처음 약속한 1년을 딱 채우고 나왔어요. 그리고 다시 혼자 이것저것 하다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차차 만나서 같이 공부하고 활동하고 그랬죠. 지금의 민주주의 기술학교를 함께 만든 사람들이요.

 

 

북돋우고 함께 성장하는 일, 민주주의 기술학교

 

민주주의 기술학교는 더 이음(더 체인지)에서 2011년 시작한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 - 모떠꿈 워크숍'에 뿌리를 둔 모임이다. 워크숍 참가자들이 아주 천천히, 느슨한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대화를 촉진하는 활동을 이어오다가 9년째인 올해 들어 협동조합으로 독자적인 조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스스로 움직이는 1인활동가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기술학교 연구원으로서 일하고 있는 박운정은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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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기술학교 동료들과 함께 (사진: 박운정)

 

대화 촉진, 또는 퍼실리테이션이라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지 기술만 익힌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어요. 요즘 어디든 대화 자리에 가 보면, 이미 자기가 충분히 역량을 갖고 있는데도 그걸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기가 가진 걸 인식하고 더 키울 수 있는데도요. 그럴 때는 “선생님이 이미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라는 얘기를 해주곤 해요.

 

흔히 말하는 ‘현장’이라거나, 자기만의 경험 같은 게 분명 필요한 점이 있긴 해요. 저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선배들에게 배운 것만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것도 있고, 심지어는 주민들의 욕구에 따라 내가 배워서 한 것도 많아요. 그런데 이런 경험을 어떻게 (일반화해서) 설명할 수가 없고, 다 나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전문가라든지, 뭐 어디의 대가고 선수고 그런 것에 의존하는 것은 불편해요. 제가 그렇게 소개받을 때도 너무 오그라들고.

 

민주주의 기술학교는 이런 지점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어요?

 

때로는 준비가 덜 되었어도 직접 참여하면서 배우는, 그렇게 우리가 함께하는 경험들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민주주의 기술학교 구성원들은 온전히 이 조직 안에 들어와서 이 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가질 수 있는 유연함이 있고, 한계도 있긴 해요. 사람을 성장시키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아직은 따로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뭐든 프로그램을 하나 하게 되면 모여서 같이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들더라도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고 공동기획을 하다 보면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테이블에서 촉진자 역할만 하던 사람이 앞에서 전체 기획과 진행을 맡아보기도 하고, 거꾸로 전체 진행을 주로 하던 사람이 테이블에 들어가 밀착해서 대화해보기도 하고. 잘하는 사람이 계속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서로 의견을 나누고 상호보완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꼭 모두가 다 앞에 서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여러 가지 해 보고 이건 자기 옷이 아니다 싶으면 안 해야죠. 그런 각자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운영, 자기가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는 곳, 안전한 실패를 경험하는 곳, 저는 민주주의 기술학교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각자 잘할 수 있는 지점에, 서로가 도움을 주고 협업하면서 이걸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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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지리산포럼에서 민주주의 기술학교 동료들과 (사진: 박운정)

 

 

 

일상의 민주주의를 펼쳐나가는 힘

 

민주주의는 어렵다. 성가시고 골치 아프다. 바닥 가득 쏟아놓은 레고 조각을 헤치며 전개도 한 장 없이 도시 전체를 조립해내야 하는 숙제 같다. 골방에서 혼자 하는 작업이라면 모를까,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가 상상한 대로 조립한 조각들을 서로 어떻게든 형태를 유지하면서 얼기설기 이어붙여야 하는 일이다.

 

이런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쏟아붓느니 전체 그림을 그려낼 만한 똑똑한 사람 몇에게 맡겨두고 내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게 낫지 싶다. 그러나 그 ‘똑똑한 사람'들의 똑똑함은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파괴하는 쪽에 훨씬 유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성벽에 둘러싸여 닿을 수도 없는 근사한 구조물을 동경하느니 뒤죽박죽이라도 내 손이 닿은 작품을, 내 주위 사람들과 함께 만들 때라야 비로소 세상과 내가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런데 그 일에는 언제나 잘 듣고, 관찰하고, 연결하는 조력자가 꼭 필요하다. 박운정은 이 피곤하고 성가신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안는 사람이다. 이번 대화를 나누면서, 어쩌면 그런 태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배우고 나누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만끽해본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자기의 관심과 흥미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양한 대화 모임에서 활약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토록 골치 아픈 ‘민주주의'가 때로는 즐거울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문득 품게 되니까 말이다.

 

어때요, 지금도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하세요?

 

네. 저는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신기하게도 단체를 그만둔 뒤에 그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그렇게, 어느덧 이십 년 차를 훌쩍 넘긴 활동가이자 퍼실리테이터가 된 박운정은 요즘 참 바쁘다. 단지 일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연말에 또 히말라야로 가기 위해 항공편을 끊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그동안 지켜본 경험에 비춰보면, 그 일을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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