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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동네친구와 마을정원을 가꾸고 싶은, 박신연숙

최지윤
2020-10-20
조회수 1302

동네친구들과 마을정원 가꾸기 (사진: 박신연숙)


* 잡초이자 약초인 케모마일처럼

 

나에게는 번역어일 뿐인데 정반대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두 단어가 있다. “공동체” 그리고 “여성주의”. “공동체”는 왠지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져 거절의 손사래를 치게 되는데 “커뮤니티”는 왠지 든든하고 재미있게 느껴져 환영의 박수를 치게 된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 곳에서는 무서운 언니들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여성주의”를 이야기 하는 곳에서는 유쾌한 언니들과 마음껏 울고, 웃으며 수다 떨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커뮤니티” 중 하나인 <더이음> 운영위원회에서 “페미니즘~”하며 신나게 소리 지르는 한 분을 마주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평소라면 ‘앗! 오늘은 빨리 집에 가야겠다.’ 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 순간 ‘뭐지? 저 언니, 뭔가 느낌이 다른데?’하는 호기심이 불쑥 올라왔다.  “호기심은 품위를 이기는 법.” 결국 아무런 사전 학습 없이 무식이 용감하게 그냥 그 언니를 만나러 간다.



 

차별이 되기도 하고 해방이 되기도 하는 페미니스트

 

지난번 <더이음> 운영위원회의에서 “페미니즘~”하면서 신나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그것부터 여쭤보고 싶었어요. 엄청 생기 넘쳐 보이셨는데 오해일까요?

 

오해 아니에요. 지금 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꿈이 있다면 페미니스트 친구를 이웃으로 두고 그 친구와 마을정원을 가꾸는 것이에요. 지금은 친구들이 대체로 페미니스트이거나 마을정원을 가꾸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페미니스트 마을 정원사 친구가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을 더 찾아내거나 관계가 쌓이면서 그렇게 되어가거나 하겠죠.



 그 사람이 정원사라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페미니스트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차별에 대한 민감성? 나는 거기에서 출발했어요. 그리고 여성에게 힘을 주는 것이요. 내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너 자신으로 살아.”, “니가 삶의 주인이야.” 이런 메시지는 별로 못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맏딸로서...”, “엄마로서...” 같은 성역할은 부당하다고 느꼈고요. 내 성향은 엄청 자유로운 것 같은데 어린 시절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 페미니즘을 접하고 해방감을 많이 느꼈어요. 나에게 페미니즘은 나 자신으로 살도록,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도록, 주도적인 삶을 살도록, 그리고 나 자신의 안정감은 다른 누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도록 계속 북돋아 주었어요.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여성학 책을 읽고, 여성단체로 들어가고, 여성운동을 하게 됐지요. 운이 좋았어요. 80년대 중반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여성인권단체가 별로 없었거든요. <여성의전화>* 에 찾아가서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했죠. 가정에서 남편한테 폭력당하는 여성들,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어요. 80~90년대, 여성들이 인권을 침해당하는 현장에서 여성들을 만나면서 활동을 해 온 거죠. 여성주의, 여성들의 연대가 개인의 삶을 성장시키고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되었어요.

   *<한국여성의전화> 1983년 폭력 없는 세상, 성 평등한 사회를 위해 설립된 법인으로 한국사회 최초로 폭력피해여성을 위한 상담을 도입하고 쉼터를 개설하였으며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음.


 

페미니즘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어요?

 

나는 오히려 여성인데 어떻게 페미니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지가 궁금해요.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선은 여자라서 차별받는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요.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왠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기준이 있을 것만 같고, 뭔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몰매 맞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페미니즘에 관한 그런 오해가 많이 있죠. 그러다 보니 자기검열을 엄청 하게 되요. “내가 페미니스트다.”라고 했을 때 편견이나 불이익도 많지요. 박완서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완전 페미니스트거든요. 그런데 당시 방송에서 “나는 페미니즘 작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페미니즘 작가라 해서 좋을 게 없었던 거죠. 요즘은 여성들이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이론도 다양해지고, 팟케스트랑 소설도 많아져서 신난다고 그날 얘기 했던 것 같네요. 요즘은 날이 좋아 들로, 밭으로 가느라 못 듣고 있지만요.


그런데 오늘 페미니즘 얘기로 시작할 줄은 몰랐어요. 내가 여성주의 활동을 해 오다보니 자기 주변에 힘든 일 겪는 분이 있으면 꼭 와서 물어보거든요. 상담 활동 안 한지 10년이 됐는데. 최근에는 너무 무거운 사례를 의논하시더라고요. 상담 활동을 그만두고 3년 정도는 정말 피하고 싶었어요. 나한테도 마음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아직도 힘들어 하는 자신을 확인했었어요.



유목하며 사람 짓는 활동가 농부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월, 금은 부정기적인 모임이나 회의를 하고 화,수,목은 정기적인 동네 모임을 하고 있어요. 토요일에는 개인텃밭에 가고요. 반상근 일을 작년 11월에 끝냈어요. 프리랜서 백수로 동네에서, 밭에서,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혼자 해도 재미있는데 여럿이 하면 더 재미있다보니 모임을 요일별로 만들어서 하고 있어요. 자연 속에서 흙을 일구며, 도시를 경작하며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흙을 일구는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_ 아현동 화분에서 상도동 텃밭으로

  

‘내가 열심히 식물을 가꾸고 있구나.’ 자각한 것은 30대에 독립하면서 아현동 달동네에 살 때였어요. 1층에 세를 살았는데 차를 가질 생각은 없어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화분을 하나 둘 놓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8년을 살았는데 나중에는 화분만 자동차 한 대를 불러야 이사가 가능할 정도로 화분 많은 집이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힐링 이었던 거죠. 시민운동을 한다는 게 빡세잖아요. 일요일마다 물을 주던 그 시간이 행복했던 기억이 나요. 식물을 돌보며 나를 돌보고 있었던 거죠. 그 때는 집이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식물들 덕에 이웃이 생겼었어요. 화분을 가져다주는 사람, 가져가는 사람, 화초 많이 키우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요. 대야에 민트류를 키웠어요. 겨울이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봄이 되면 화분에 민트가 한 가득 되거든요. 그러면 자기 몇 뿌리 줄 수 있냐고 묻고, 몇 뿌리 분양하고 그러다 철거가 돼서 쫓겨났어요.

 

상도동으로 이사를 하는데 식물을 기를 수 있는 집을 찾더라고요. 국사봉산 바로 밑에 있는 빌라를 얻었어요. 주변에 작은 텃밭이 있었거든요. ‘이 밭은 누가 가꾸나?’ 지켜보다가 “저도 하면 안돼요?”하면서 시작했어요. 그 즈음 주민들과 여성조직을 하나 만들었는데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지렁이 분양활동을 해 보겠냐며 연락이 왔어요. 도시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로 퇴비를 만든다는데 귀가 솔깃하더라고요. 지렁이를 먼저 접하고 그러다가 도시농업을 접하게 됐어요. 아현동에서는 화분에 식물을 기르는 것만 알았는데 그렇게 상도동에서는 텃밭을 일구게 되었죠. 서울시가 도시농업 원년을 선포하고 노들섬에 텃밭을 조성했어요. 분양받아서 같이 도시농부 학교를 열기도 하고. 그렇게 도시농부가 되어갔어요.


흙을 일구는 삶 (사진: 박신연숙)


_ 상도동 <카페나무>에서 아현동 <행화탕>으로


그리고 지역을 기반으로, 여성인권을 의제로 한 지역주민 활동을 기획하고 있었어요. ‘상도동은 아는 사람은 없지만 동작구 전체로 보면 대방동, 사당동 양쪽을 다 아우를 수 있겠군’하고 이사를 했지만 친구가 없어서 ‘이런 잘못 생각 했군.’했죠. 1년 놀면서 동네친구를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좋은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비영리민간단체를 만들었어요. <여성의 전화>에 있으면서 폭력 가정에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고민이었어요. 상도동에서 사귄 친구들이 40대 초반이 많다 보니 주로 자녀가 청소년기에 있었어요.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을 만나보자.” 했죠. 우리가 먼저 생각한 건 아니었고, 어떤 기관에서 그런 활동을 할 모임을 찾고 있더라고요. 그동안 길거리 상담을 해 왔는데 앞으로는 주민들의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관계망이 안전망이 되도록 하는 과제가 주어져 풀뿌리여성단체를 찾고 있다고요. “우립니다.” 했죠. 신림에 있는 쇼핑몰 앞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청소년들을 만났어요. “이 친구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해서 카페 형 쉼터인 <카페나무>를 만들었고요.

   * <좋은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2009년 동작구 평화마을 지킴이 활동을 시작으로 2010년 1월에 발족한 비영리민간단체로 마을사람들의 즐거운 참여로 우리 모두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가고자 활동하는 풀뿌리여성단체이며 마을카페 <나무>,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를 운영하고 있음.


거기 계속 살 줄 알았는데 7년 정도 살았을 때 편지가 왔어요. 임대아파트에 살겠냐고. NGO활동은 수입이 얼마 안 되고, 앞으로 점점 더 일을 할 수 없는데 주거비는 계속 오르니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7~8년 가까이 주민들과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청소년을 만나고, 카페도 운영하고.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휴식도 필요하고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 이사를 결심하게 됐어요. 이사를 오고 주거문제는 해결 됐지만 우울했어요. 2년 동안 출퇴근을 하며 반일제 시민으로 살았는데 상도동과 아현동의 삶이 너무 달랐거든요. 상도동에서는 좋은 이웃을 많이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카페나무>도 너무 좋고, 주민들과 그 공간에 있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아현동에서는 만 명의 이웃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아파트에서 동네 친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동대표에 나가기로 했어요. 4년째 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반상회처럼 주민 소통의 날을 하면서 살금살금 동네 활동을 시작했어요.


(<행화탕>이라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누군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동네 주민이란다.)


이게 동네 사는 맛이죠?

 

아현동에 이사 왔을 때 모든 게 변해있었어요. 재개발은 동네를 싹 밀고 다시 짓는 거니까요. 아현시장, 대로변 상가들, 포차 정도 남아 있었어요. 포차는 민원이 있어 강제 철거됐고요. <행화탕>은 60년 된 목욕탕이었는데 젊은 문화기획자들이 인수해 약간만 리모델링해서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20년 정도 문을 닫았던 빈 건물에 온기가 불어 넣어진 곳이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운영하는 분들이 <행화탕>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건 아니고요, 어떻게 안녕해야 할까를 염두에 두면서 인수했다고 하더라고요. 예술로 목욕하는 프로그램으로 개소식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그걸로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염색을 하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프로그램들이 너무 근사한 거예요. ‘거기가면 동네 친구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갔더니 서른 명이나 있었어요.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없고 멀리서 온 사람들만 있는데다 올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왔다가 교육 끝나면 그냥 다 가더라고요. 기획자한테 따로 얘기 했어요. 동네가 재개발 됐는데 원주민 입주율이 10프로가 안되고, 여덟 번 수업에 참여 했지만 동네 친구가 없다고. 따로 모아줄 수 있냐고. 그 분 포함해서 6명을 모아주셨어요. 그렇게 <살구꽃> 모임을 시작했어요. 그때 만난 분들이 이사 후 첫 동네친구에요. 그 때 마침 세입자를 구하는 빈 건물에 화단이 비어 있길래 가꿔보자고 했죠. “그거 꼭 해야 돼요?”라며 극성맞아 하면서도 같이 하시더라고요.


<행화탕>이 맺어준 인연 여섯 명 중 한 분은 60대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두 분은 이사를 하고, 한 분은 아이가 태어나고, 한 분은 취직을 하면서 다 헤어졌어요. 그래도 <살구꽃> 모임이 발판이 돼 <아현동 사람들> 이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모임을 만들 때 30년 지기가 동네로 이사를 왔어요.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동네사람 모아서 농사를 짓자고 했고 <아현동 사람들> 모임이 옥상모임이 됐어요. 동에 살던 사람들, 한살림에서 만난 사람들, 텃밭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1년 간 재미있었어요. 주머니텃밭으로 시작했는데 평생 처음 해 보시는 분들이었거든요. 배추와 무를 구별 못하고, 부추를 거꾸로 심고, 토마토를 묶어 주라는데 감자를 묶고 너무 웃겼어요. 그렇게 세 달 가까이 다니면서 무 하나 배추 하나를 길러서 수확해 가는데 그 경험이 너무 좋은 거예요. 배추로 겉절이 하고, 된장 파스타 선생님 모셔다 함께 요리해서 겉절이랑 같이 먹고. 15명 농부가 같이 피날레를 하고. 도시에서 텃밭을 하며 동네사람들이 모여 서로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경험한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카페나무(사진: <좋은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홈페이지)                   행화탕(사진:<행화탕> 홈페이지) 



  _공동텃밭에서 개인텃밭까지. 그리고 마을정원과 협동조합으로


가끔씩 자신에게 질문하게 돼요. ‘나는 왜 땀을 흘리고, 풀을 뽑고, 작물을 키우지?’, ‘내안에 뭘 채우느라 그러는 걸까?’, ‘뭐가 그렇게 좋아?’


뭐라고 답하고 계세요?

 

옛날에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져서 이런 진통제가 또 있을까 싶었어요. 자연이 인간을 치유하는 힘이 있어요. 개인 텃밭은 토요일에 가는 게 제일 좋아요. 쉼과 텃밭 활동이 만나면서 극대화 되거든요. 할 것만 하고 추수해서 가는 농부들은 저보고 10평 텃밭에서 하루 종일 뭐하냐고 하시죠. 여기 있는 게 좋아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귀촌하는 기분이라 여행도 덜 가게 돼요. 식물생활이라는 게 풀을 뽑는 건데, 풀을 뽑으면 안 보이던 게 보여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요. “풀 뽑는 거 최고야. 풀 뽑는 바람에 너를 보는구나.”해요. 하루에 보통 2~3시간 정도해요. 사람들하고 같이 할 때는 땀 식히면서 차도 한 잔 하고요.

 

도시 텃밭은 매년 추첨으로 분양받게 되니까 밭의 위치가 바뀌어서 겨울농사를 할 수가 없어요. 개인 텃밭은 계속 경작할 수 있어서 10년 만에 겨울농사를 했거든요. 양파를 수확 했는데 줄기가 어찌나 많고 파릇파릇한지. 양파 줄기는 팔지 않잖아요. 내 삶에 양파 줄기가 끼어든 거죠. ‘어떡해야 하나?’ 온라인에서 찾아보고는 아침에 계란국에 넣어 먹고 양파줄기김치를 담그고 왔어요. 내가 작물을 키우니까 직접 요리를 하게 되요. 같이 요리해서 먹을 때 참 재미있고요. 당근마켓에 텃밭에서 나는 것을 팔기 시작했어요. 케모마일, 수레국화. 렘스이어가 밭 한 평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벌써 10명도 넘게 거래 했어요. 도시에서 케모마일도 키우고. 당근마켓을 통해 만나고 그러네요.



동네 모임 얘기 좀 자세히 해주세요.

 

화요일은 마포구에서 분양 받은 상암동 다섯 평 텃밭에서 대여섯 명이 같이 농사를 짓고 있어요. 둘째 주에는 책을 읽고, 마지막 주에는 시네큐브에 가서 그 시간에 하는 영화를 봐요. 도시에서의 삶은 대부분 2년에 한 번씩 이사하고, 여성들의 삶은 자녀의 성장과 함께 계속 변하다 보니 새로운 분들이 오시고 있고요.


수요일은 가드너 모임이에요. 시간이 되면 원예, 조경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풀타임 때는 못했는데 반상근을 하면서 서울시 <시민정원사> 과정을 수료했어요. 4기를 졸업했는데 6기까지 졸업한 분들이 500명이 넘어요. ‘우리 지역에 사는 정원사들을 모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작년 1월에 3명을 만났는데 매달 1명씩 늘어서 지금은 10명이 됐어요. 경의선 숲길의 일부를 가꾸기 시작했어요. 이후에 민간단체를 설립해 공모사업으로 동네 언덕에 가꾸는 이 없는 정원을 찾아내서 가꾸고 있고요. 마을정원사들인 거죠. 조금씩 자기 분야가 있는 실력자들이 모여 있어요. 도시농업, 꽃꽂이, 디자인 등 정원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정원사가 된 8명이 집중해서 하고 있어요. 각자 설계부터 직접 해 와서 서로 맞추고, 꽃집에도 같이 가고, 식재하고, 전문가 자문 받아 다시 식재하고. <마을정원사> 과정을 열어 같이 가꿀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어요. 전업주부였거나 가게를 했거나 퇴직을 하고 인생2모작을 준비하는 50~60대가 대부분인데 20대도 오고 재미있어요. A부터 Z까지 우리 손으로 해 봐야 한다는 분들이에요. 공동의 관심사, 책임, 역할로 움직여서 그런지 출발이 좋았어요.

 

목요일 모임은 아파트 모임인데 4년 전에 동대표가 되어 반상회처럼 주민모임을 열었을 때 오셨던 분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이런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계속 오셔서 4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분들이 몇 분 있어요. 이분들이 7월 선거에 동대표로 출마해요. 활동 경험도 쌓이고, 주민들 속에서 같이 어우러져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이런 일에 시간을 내려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혼자서는 용기내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너도 하냐? 나도 하자.” 했던 네 분에 선관위까지 다섯 분이 계세요. 같이 있을 수 있게 돼서 좋아요. 그러는 사이 동아리도 만들었고, 올해는 공적 자금을 활용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만들 거예요. 텃밭을 하면서, 자연을 접하고 일구는 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지 보려고요.


(인터뷰 이후 7월 동대표 선거에서 네 분 모두가 당선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확인했다. 동대표 되신 네 분 모두 축하드리며 “나도 하자!” 응원 합니다.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도 축하드립니다. 분명히 표를 던지며 짐작하신대로 살기 좋아질테니까요.)

 

  

화수목 동네 모임 (사진:박신연숙)



식물을, 사람을, 지역을, 사회를...그렇게 존재를 살리는 살림이스트


식물을 키우고 텃밭을 하면서 만난 주민들하고 페미니즘 얘기하고, 여성주의 모임하면서 같이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느낀 건데 생태감수성과 페미니즘이 연결이 잘 되더라고요. 페미니즘을 만나서 자신의 욕구에 더 집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면 식물생활을 하면서는 좀 더 자연과 관계하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 존재하는 것에 더 많이 의미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나를 존재하게 하는 노동들을 늘려가고 싶어요. 대표적인 게 살림이지요. 작물을 키우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그런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요. 20대에 자의식이 막 생기고 페미니즘에 몰입할 때는 집안일을 경시했어요. 최대한 적게 하고 몰았다 하고요. ‘왜 여자만 해야 돼?’하는 거부감이 있었어요. 대가가 없다보니까 무가치하게 여겼던 거죠. 이제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노동임을 아니까 재미있어요. 살림, 작물처럼 사람에게 꼭 필요한 그런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고,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알려주고 싶고 그래요. 


누구나 겪는 고비가 있었을 텐데요.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너무 많은데 어떤 걸 얘기해야 할까? 성인이 되고 10년 단위로 큰 변화가 있었네요. 40대에 풀뿌리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사는 곳도 옮기고, 익숙했던 단체를 그만두고, 새로운 단체로 옮기고, 1년간 준비해서 조직을 만들었어요. 새로운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힘과 지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시련, 고민, 힘듦이 되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런 갈등을 경험해 보지 않았고, 위기를 별로 모르고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맞서기보다 내편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지역 활동이 많지 않았기에 함께 활동할 친구들을 찾아내고, 서로 좋아하고 믿는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게 더 중요했거든요. 지금도 그렇네요. 3,800세대지만 소수의 임대아파트 안에서 주민들을 모으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을 대할 때 판단하기보다는 공감하는 편이에요. ‘시민운동이 나랑 잘 어울리나? 날을 세우고 비판적인 사람이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10년 전에는 조직을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딱히 목적이 있진 않아요. 그때는 ‘활동하는 나’가 내 인생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그냥 존재하는 나’ 일 뿐이거든요. 텃밭을 가꾸는 게 내가 존재하고 몰입하고 치유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람들도 그런 걸 경험하면 좋겠다는 정도에요. 햇볕 쬐고, 바람 맞고. “혼자하면 뻘쭘했을텐데 같이 하니까 좋다.”고 하면 나도 좋더라고요. 이웃과 자연과 함께 할 수 있고, 내가 애착을 갖는 나무도 많아지고, 거리도 많아지고. 그런 것들이 내 뿌리를 튼튼하게 해줘요. 이 사람들이 언제 이사를 갈지, 취직을 할지, 내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부유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여기 아파트에 막 이사 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잠들고 일어나는데 전화번호에 아는 이 하나 없다는 게 외로움을 줬지만 이제는 아니거든요. 내 집 앞에 나만의 텃밭이나 정원은 없지만 공유공간이 많아지고, 도시에서 그것을 같이 일구는 이웃들이 있어서 나 자신을 더 안전하게 느끼게 되요. 나를 지키는 건 자신이기도 하지만 이웃도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죠. “우리가 이렇게 쌓아왔어.”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좋다!”  (사진: 박신연숙)



“보리, 보리, 보리~~~보리!” 보리 언니~ 


별칭에 담긴 사연이 궁금해요.


제주 올레를 완주 했어요. 여러 번 갔죠. 바닷가에 많이 갔는데 청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 보리 소리에 반해서 보리에요. 보리밭이 바다랑 너무 잘 어울렸어요.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요. 질서보다 무질서, 변화무쌍함.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었죠. 제주가 바람이 엄청 세잖아요. 거기서 나는 소리가 어찌나 경이롭던지. 여행이라는 행위와 바다 소리에 보리 흔들리는 소리까지 여러 박자가 맞았던 거죠. 마음이 꽉 차는 걸 접하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농사지을 때도 많이 느껴요. 땀 흘리고 농사를 지으며 씨앗을 보면서 엄청난 것을 경험해요. 씨앗은 정말 너무 쪼그마한데 그런 세계를 갖고 있잖아요. 수확하고, 나누어 먹고. 농사의 완성은 나눔이에요. (하시며 직접 농사지으신 케모마일을 한 다발 건네신다.) 물을 자주 갈아줘야 되요. 다 시들었다고 들에 버리죠, 그러면 거기는 캐모마일 밭이 돼요. 번식력이 엄청 좋아요. 잡초인거죠. 불면증에 좋아요.



 

<보리>가 건넨 케모마일 꽃다발을 왼손에 고이 들고 <행화탕>을 나와 아파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텃밭을 둘러본다. 야외 카페 부럽지 않은 화분 텃밭, 어린이집 꼬마들이 놀이하는 텃밭, 어르신들이 가꾸는 텃밭, 모임에서 함께하는 텃밭. 지렁이도 구경하고 튜울립 구근은 오른손에 얻어 들고는 동네언덕에 자리한 야생화 정원으로 향한다. 주민들이 가꿔놓은 정원에 자리한 꽃들 이름을 하나씩 소리 내어 읽어 본 후 <보리>가 일러 준 뒷길로 헤어져 내려온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파트 숲 사이 작은 화단에 보리가 한 가득 심어져 있는 게 아닌가. 소리가 들릴까 싶어 귀를 기울여 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어보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 소리를. 닮고 싶다. 언제나 뭔가를 나눠 주는 <보리>를. 여행을 하다보면 나란히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이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 아주머니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여성은 품고, 먹이고, 보고 살피는 몸을 갖고 있으며 남성은 세우고, 나아가 싸우고, 이루어 내는 몸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주는 음과 양의 조화로 굴러간다는데 우리는 지나친 양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남자들에게 유리한 세상처럼 보이겠지만 어찌 보면 그래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고달프고 그로 인해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고달파지는 건 아닐까? 경제 성장 곡선은 꼭짓점을 찍었는지 점점 아래로 향하고, 이상기후로 경계가 무너지고, 바이러스로 활동 범위가 축소되고...아마도 균형을 맞추기 위한 어떤 흐름은 아닐까? 이유야 뭐가 됐든 덕분에 서로를 품고 보살피며 지천에 널린 풍요를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드러나기 시작 한 것 같다. 그렇게 살아오느라 애 써 온, 그렇게 사는 것이 점점 더 만족스럽다는 언니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랜 시간 그런 살림살이를 위해 씨를 뿌리고, 가꾸어 왔을 수많은 살림이들에게 감사함이 올라온다. 이제 페미니스트 언니들 무섭다고 징징대는 건 멈추고 공부 좀 해야지. 다음 모임에서 <보리>를 만날 때는 친구가 만든 보리 도장을 찍어 만든, 최애살림 손수건을 나눠야겠다. 그리고 항상 나눌 것을 가방 속에, 마음속에 넣어 다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언니들처럼.


최애 살림 손수건 <그림: 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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