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활동가'로 살래요 - 정치발전소 유의선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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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활동이 나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과연 내가 활동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활동가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유의선이다. 나는 왜 유의선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까.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의 사생활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를 말하면 굳이 다음 말을 안 해도 된다. 서로의 은밀한(?)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과 다른 차원의 친밀감이 있다.  

유의선을 처음 만난 건 2004년이다. 사회복지를 공부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 받는 일에 분노했고, 사회복지 서비스가 시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에 화가 났다. 사회서비스는 정책과 법을 바꾸지 않고는 시혜적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의제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2년에 ‘민중복지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우리 단체와 빈곤사회연대는 같은 사무실을 썼다. 단체의 이름은 달랐지만 겹치는 활동이 많았다. 유의선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빈곤사회연대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녀는 늘 분주하고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도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대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술 먹자거나 고민이 있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고 마셨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 행동은 나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긍정적 에너지를 주었다. 그리고 예의가 발랐다. 나와 한 살 터울밖에 안 나는데도 꼬박 꼬박 “언니"라고 불렀고 존대말을 썼다. 

** 공덕동 인근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유의선


6월 15일 오후 6시, 공덕동 인근에서 유의선을 만났다. 


“언니도 알다시피 나는 학생운동 출신이에요. 1996년도 연세대 사태에 결합했어요. 연세대 사태를 마무리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갔어요. 청계천에서 시다를 하다가 인천의 남동공단에 취업해서 일하고 있었어요. 연세대 사태에서 한총련 재정국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구속이 됐어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4개월 살고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민주노총에 있는 아는 분의 추천을 받고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의 서울센터 일을 했어요. 얼마 후, “실업자도 노동자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서울지역 ‘실업운동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실업문제를 다루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대로 만들어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국민기초법 현실화, 최저생계비 현실화 싸움을 그 때 시작했죠. 명동성당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인 최옥란씨와 함께 농성 했어요. 수급을 받던 최옥란씨는 다음해에 수급이 탈락될 상황에 놓이자 이를 비관해 자살 했어요. 최옥란 열사의 죽음을 보고 빈곤문제를 풀기 위한 활동을 내가 평생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빈곤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실로 거창한 의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물론 현재진행형이다. 2008년에 빈곤사회연대의 소속단체인 전국노점상총연합(전노련) 고양지부에서 한 분의 노점상이 돌아가셨다. 그때 지도부가 모두 수배를 받자 유의선은 상황실장을 맡았고, 장례를 치렀다. 잠시 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09년 1월에 용산참사가 터진 것이다. 빈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추모제 사회를 봤는데 체포영장이 떨어졌으나 다행히 구속은 면했다. 그 이후로 활동을 제대로 못 하자 우울증이 생겼다. 그냥 있으면 우울증이 심해질 것 같아서 텐트와 코펠 하나를 챙겨서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녔다.


“온전히 놀아본 적이 별로 없어요. 수련회 등을 가도 맨날 회의하고 밤새워 술 먹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집에 왔어요. 아무 생각 없이 놀러 다니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면서 우울증도 나아졌고. 여행 가기 전과 여행 갔다 온 후가 너무 달라요. 나는 평생을 빈곤운동을 하면서 살겠다고 했지만 그러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잠시 쉬었어요. 돌이켜보니 도망쳤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됐어요.”


몸이 안 좋아 쉬었을 뿐인데 도망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괴감에 빠져 지냈다. 그러기를 두어 달,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고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진보신당 대외협력실장으로 일한다.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곧이어 통합진보당 사태가 터졌다.  더이상 정치 공간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먹고 살 길을 찾다가 마땅한게 없어서 노점상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노점하는 분들이 직접 해보라고해서 노점을 시작했죠. 2012년, 금천구 시흥동에서 마차 하나를 얻어서 붕어빵을 팔았어요. 매일 단속을 받았어요. 봄이 되자 더 이상 붕어빵이 팔리지 않아서 떡볶이와 튀김을 추가했어요. 하루 걸러 단속이 들어왔어요. 그래도 어찌어찌 버텼어요. 가을에는 400만 원을 대출받아서 아예 박스형 노점을 시작했어요. 핸드폰 케이스를 팔았는데, 이때부터는 단속이 집중되어서 3개월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박스를 지켰어요. 저뿐만 아니라 저의 마차를 지키던 다른 노점상 분들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결국 마차를 뺏겼어요. 너무 힘들어서 계속 싸울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노점을 접고 녹즙배달을 했어요. 그 이전에도 골프장 캐디, 가사도우미, 전단지 붙이는 일, 봉제공장 시다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마음속으로는 항상 노점상, 노숙인, 빈곤계층과 함께 하며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게 내가 할 일 이라고 믿었어요. 30대에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을 했으니까 운동의 경력이 쌓이는 40대에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막상 40대가 되니 방향을 잃었어요. 노점상 조직이 세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은 못해도 한 걸음 보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전노련에 갔어요. 그런데 단순히 현장투쟁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용과 방식을 바꾸고자 의장 선거에 나갔어요. 낙선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주류 운동에 닿지 못하는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운동을 꼭 주류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뼈를 갈아 넣으며 활동할 때는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더 많은 변화를 만들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생기죠.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첫 번째가 노점, 두 번째는 요리, 세 번째는 고양이래요(웃음).”

** 2012년 금천구 시흥동에서 노점을 하고 있는 유의선.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 (사진; 유의선)


나는 유의선을 떠올리면 ‘술’이 먼저 생각난다. 언제 어디서든 가장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것은 주량이 세다는 것도 한 몫했지만, 늘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싱글인 그녀에게 결혼생활의 피곤함을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도 공감해 주었고, 활동하면서 느끼는 소외감을 털어 놓아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음식’이다. 유난히 김치를 많이 먹는 우리집은 겨울이면 꼭 김장을 했다. 귀찮은 김장을 혼자 하는 건 엄두를 못 낸다. 엄마의 훈수가 필요했고, 일손이 필요했다. 유의선은 내가 김장을 한다고 통보하면 두 말 없이 우리집으로 달려왔다. 사실은 김장 후에 수육을 삶아 소주 한 잔 하는 재미가 더 컸다.  


“추운 겨울이었어요. 기초생활보장법 개정 농성을 여의도에서 했어요. 여의도는 물가가 너무 비싸요. 심지어 김밥도 비싸더라고요. 농성장에는 장애인 분도 있고, 노점상 분들도 있고,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는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해요. 당시에 활동비를 60만 원 받았거든요. 그걸로 밥을 사먹으면서 농성을 하는 게 쉽지 않죠. 할 수 없이 내가 재료를 사와서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음식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전까지는 음식을 만들일이 없었어요. 집에 가면 늘 밤 12시가 넘었으니까. 조금씩 음식 만드는 일에 재미가 붙었어요.  밖에서 사 먹느니 제철 재료 사다가 우리집에서 먹자면서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는 애인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파티를 했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만들어서 먹었어요. 

음식을 만들면서 머리가 맑아진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늘 싸우는 일을 기획하고, 하는 일이 싸움이잖아요. 언제나 뭔가 요구하고 소리지르고. 노점 할 때는 단속반과 싸우느라 몇 달씩 밤새면서 허리 꺾이고 팔 부러지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기쁨은 무엇일까, 하는 우울감이 들었어요. 생각 끝에 맛있는 걸 자주 해 먹자는 결론을 냈어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저에게 큰 변화에요. 지금도 우울증 왔다는 사람 있으면 캠핑을 데리고 가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요. 어쩌면 이런 게 나만의 운동 방식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유의선은 ‘의리’ 빼면 시체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기 일쑤인데도 사람을 챙긴다. 그래서인지 그녀 곁에는 늘 사람이 있다. 


“정말 행복했던 때는 가장 열심히 투쟁했을 때예요. 94년도에 총학생회장 했을 때랑,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했을 때랑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 했을 때, 이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뭔가를 하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일이 끝나고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고 집에 와서 누우면 몸은 힘들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행사 하나 끝나면 서점에 가서 요리책을 사서 요리를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먹는 거죠(웃음). 혼자 뭔가를 한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요. 영화는 혼자 봐도 되는 거잖아요. 영화를 보려고 마음 먹으면 여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불편했어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영화관도 잘 안 갔어요.  

지금까지 내 삶에서 한 번도 빈곤문제를 삭제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예전처럼 현장에 있거나 시위대 맨 앞에서 짱돌을 던지거나 집회에서 사회를 보지는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를 항상 고민해요.”

** 얼마전에 담갔다는 여름김치. 행사가 끝나면 꼭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다.(사진; 유의선)


내 기억 속의 유의선은 늘 역동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집회에서 마이크 잡고 사회를 보는 모습이다. 청력이 안 좋은 내 귀에도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하나는 음식을 거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모습이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아낌없이 재료를 사고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다. 마치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어머니처럼.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노점, 음식, 고양이, 이 세 가지가 생각난다는데 이제는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노점은 안 떠올렸으면 좋겠고, 좀 더 교양있고 우아한 이미지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노점활동을 10년을 했지만 그래도 노점보다는 ‘조직가’로 불리고 싶어요. 예전의 나는 추진력 있고, 집회할 때 사회도 잘 보고 그랬는데 왜 조직가로 안 떠올리고 ‘노점’, ‘음식’,‘고양이’를 떠올리는지. 좀 없어 보이지 않아요?(웃음)

2018년 9월부터 ‘정치발전소’라는 단체에서 교육국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정치발전소는 민주주의와 좋은 정치를 위해 교육 활동을 하는 곳이에요. 최근에 정치발전소에서 ‘마키아벨리의 편지’라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매월 정치발전소가 선정한 책을 가이드북과 함께 회원들에게 배송해요. 관련 주제로 특강을 열고 독서모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처음으로 제 인생에서 투쟁하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지요(웃음).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싸움에서 이길까, 하는 고민만 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색했어요. 공장에서 기계만 만지다가 사무직에 온 느낌? 그런 느낌이에요.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데 부정적인 단어를 안 쓰면서 말하고 있는거예요. 놀랐어요. ‘현실은 이렇게 치열하고 각박한데 양반 기침하는 소리 하고 있네’라고 말할지 몰라요. 저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은데 좋은 얘기를 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야 몸과 마음에 긍정적인 기운이 생겨요. 운동도 정치도 공부해야 좋아지고 소진하는 만큼 채워넣어야 해요. 활동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아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 어색해도 정말 필요해요. ‘정치발전소’가 더 폭넓은 운동을 하고 더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한 중간 단계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면 무조건 했거든요. 아마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활동가의 삶을 선택할 것 같아요.”

** 정치발전소에서 진행하는 특강. 유의선은 요즘 이 곳에서 교육국장으로 일하고 있다.(사진;유의선)


놀랍다. 힘든 활동가의 길을 다음 생에서 또 걷고 싶다니. 나는 다시 태어나면 활동가 말고 좀 더 폼나는(?) 일을 하고 싶은데. 활동가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도 있지만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활동가가 된 사람이 더 많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그렇게 빨리 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활동가의 등골을 빼 먹어야만 겨우 변하는 게 우리 사회다. 믿기 어렵지만 아직은 그렇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이 딱 사흘밖에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텐데, 라며 기다렸더니 정확하게 내 생각과 일치하는 대답을 했다.   


“인생 최대의 술판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원 없이 수다떨고 맛있는 걸 먹겠어요(웃음).”


이러니 내가 유의선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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